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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 에세이]당신 같은 나라에서 아이를 가져서 미안해요
입력 : 2010-06-06 18:17:02ㅣ경향신문

속이 영 불편합니다. 가슴에 묵직하게 얹혀 있는 돌덩이를 토해내려고 엊저녁에 마신 술 때문이지요.

이 나이가 되어서조차 발설에 엄두와 용기가 필요하다니 참 한심합니다. 음란어도 금기어도 아닌데 낙태에 대해 세상은 입을 꼭 다물고 있습니다. 애끓는 사연은 넘치고 반대여론은 높은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작정한 것처럼 사회 전체가 함구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수상쩍습니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나는 여자 환자들과 살아가는 나이 든 한의사입니다. 며칠 전 휴대폰을 받으니 흐느끼는 목소리. 발신자 이름이 안 뜨는 걸 보니 밝히고 싶지 않은 사연인가 봅니다. 선생님 임신을 했는데요, 흑흑… 그래서요… 남자친구랑 다투다 헤어졌어요… (절로 나오는 한숨) 아기는요… (커지는 울음소리) 어떻게 도와주면 될까요, 산부인과 선생님을 소개해줘야 하나요… 그건 아니에요, 제 말을 들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언제든지 말하고 싶을 때 또 전화해요, 그렇게 끊고 두 번쯤인가 더 전화를 받았지요. 목소리만으로도 반듯한 성품이 느껴지는 여성이었어요. 남자친구와 헤어진 이유는 피임도 제대로 못하느냐, 찌질하다, 며 짜증을 내더랍니다.

세상에 유통되는 많은 오해 중 하나. 아내가 잘해서 남편에게 맞지 않고 산다? 둘. 피임을 완벽하게 해서 임신이 안됐다? 첫 번째는 인품이 좋은 남편이라 폭력을 안 휘두른 것이고 두 번째는 임신 확률이 낮은 커플이라 피임에 성공했는지도 모릅니다. 연인이란 사람은 정자를 배출하는 데만 용맹을 과시했지 책임과 고통을 나누는 마음까지가 사랑이라는 걸 모르나봅니다. 회피하고 외면하고 싶을 수도 있지요. 어차피 그 남자의 몸을 떠나 그녀의 몸속에서 일어난 일이니까요.

세계의 지성이었던 프랑스의 장 폴 사르트르가 생각납니다. 1970년대, 살인적인 불법 낙태로 목숨을 잃는 여성들이 많았던 프랑스에서 ‘낙태 합법화’ 운동이 벌어졌을 때 맨 앞에서 거리행진을 하던 시몬 드 보부아르 옆에는 파트너인 사르트르가 함께 있었습니다. 둘은 같이 경찰에 연행됐다가 풀려났지요. 취재를 하던 장 모로 기자는 ‘나는 낙태했다’고 밝힌 소설가 프랑수아즈 사강 등 여성 343명의 선언이 여론화된 후 매일 낙태를 원하는 여성과 엄마들의 전화를 받게 되자 런던의 한 병원을 소개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 뒤 자신도 비혼여성으로서 불법낙태와 화장실에서의 사산이라는 참혹한 고통을 겪어야 했던 보건장관 시몬 베이유에 의해 프랑스 의회에서 낙태가 합법화되었습니다.

맥으로도 임신인걸 알 수 있나요… 혹시나 싶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묻는 근심어린 얼굴. 벌써 두 달이나 월경을 걸렀네요… 먼 곳에서 월차 내고 찾아올 때는 도움을 받을 수 없어서겠지요. 펑펑 웁니다. 기가 막히네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어릴 적 어머니를 따라 전차를 타고 시내에 있는 의원에 갔습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얌전히 기다리다 아픈 기색의 어머니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유산을 하신 거지요.

1960년대 가족계획 구호는 ‘넷만 낳아 잘 키우자’였어요. 8형제 중 넷째인 아버지와 4남1녀 중 딸인 어머니가 결혼하여 달랑 삼남매로 그친 데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출산 구호는 점점 셋에서 둘로 줄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인구정책 성공 국가가 되었는데요. 피임 교육의 영향도 있겠지만 국가의 암묵적 동의와 방조로 낙태가 큰 몫 했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말 잘 듣는 모범시민인 저도 산부인과의 도움을 받아 둘만 낳았고요. 말만 안 한다 뿐이지 대한민국에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낙태로부터 자유로운 남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와서 고령화사회에 낮은 출산율로 국가경쟁력이 떨어진다니까 엄벌에 처한다고 합니다. 산부인과 의사 친구 얘기로는 다들 고발당할까봐 벌벌 떤다네요. 신문에 보도되었듯이 수술비도 천정부지로 오르고 중국에는 한국인 의사를 두고 수술해주는 병원도 있어 원정까지 간답니다. 돈 마련 때문에 방 보증금을 빼서, 애써 들어간 직장을 나와 쥐꼬리만한 퇴직금을 타서, 고금리로 급전을 빌려 거리를 헤매는 여자들. 심각한 경제적 이유로, 직장생활로, 건강문제로, 교육비 걱정으로 유산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개인마다 분명히 있습니다.

아무런 고려도, 현실에 맞는 법 손질도, 확실한 보육정책도 없이 하루아침에 고발과 단속을 강행한다는 정부의 발표는 수많은 여성들을 불안과 공포의 벼랑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누군가 핏빛 슬픔으로 세상을 원망하고 죽음의 희생을 치르고야 말리라는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피치 못할 사정 따위는 깔아뭉개면서 불법낙태죄로 여자들을 감옥에 보내는 것이 과연 잘하는 법치인지요. 제도와 법이란, 가장 열악한 소외된 관점에서 바라봐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우리들의 잘못을 고백합니다. 몸은 나눴지만 고통은 여자 책임이라는 남자를 봐주는 나쁜 습관이 있습니다. 여성에게 불친절한 법이 사문화된 줄 착각한 무지도 큽니다. 투표권을 가지고도 제대로 된 법 하나 만들지 못한 죄는 더 큽니다.

오늘도, 시퍼렇게 단속의 칼날을 벼리는 낙태금지에 수많은 ‘은이’(영화 <하녀>의 여주인공)는 눈물로 지새우며 힘없이 중얼거립니다. 당신 같은 나라에서 아이를 가져서 미안해요.

<이유명호|한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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