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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년 (작은책...김현진칼럼)

2010.10.01 15:39

약초궁주 조회 수:1563 추천:201

도둑년(<작은책> 2010년 7월호)

김현진/ 에세이스트

미스 김은 하루를 네 등분으로 쪼개 살고 있다. 아침 나절에는 녹즙을 배달하고, 녹즙 배달이 끝나면 얼른 ‘주간 커피 야간 맥주’의 다방으로 달려가고, 다방에서 일하면서 짬짬이 책을 보거나 해야 할 공부를 하면서 커피 나르고 설거지하는 일이 끝나면 운동도 하고 글도 쓰고, 남은 시간에 잔다. 시간이 금방 가는데, 미스 김은 요즘 유독 힘들었다.

대학 시절에 등록금 벌어 대느라 정규직으로 일하면서 학부를 마친 적도 있고, 주간 대학원 과정을 들으면서 회사 생활을 한꺼번에 한 적도 있는데, 왜 유독 요즘 시름시름 아픈지 생각해 보니 익숙하지 않은 일에 처음 도전해서 그런 거였다. 녹즙 ‘배달’이라고 쓰고 ‘영업’이라고 읽어야 하는 이 일이나 다방 일이나 다 사람 대하는 일인데 책상머리에만 앉아 일했던 미스 김은 사람 대하는 일을 해 본 적이 없다. 이 분야에서는 그야말로 저숙련 노동자 그 자체다.

녹즙 일은 석 달이 넘어가니 그럭저럭 할 만하고 그 전에도 홍대 앞 카페에서 일해 본 적은 있지만 여기는 다르다. ‘다방’과 카페는 다르다. 사장이 직접 집에서 로스팅한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리지만 커피 맛 같은 거 별로 상관하지 않는 손님들이 온다. 설계 도급 계약서나 보험 계약서를 든 손님들이 휴대 전화를 한쪽 귀에 끼고 바쁜 걸음으로 들어와 “여기 커피 둘!” 하고는 자기 일에 열중한다. 같이 일하는 아가씨 말로는 그전에는 합의 보러 온 사람들도 그렇게 많았다 한다.

하지만 커피 맛 잘 모르는 손님들만 온다고 생각한 건 미스 김의 오해다. 며칠 전에 커피 맛의 전문가를 자처하는 손님이 왔다. 다섯 시 반이면 생맥주 영업을 준비해야 해서 커피머신을 끄는데, 굳이 다짜고짜 커피 한잔 마셔야겠다는 손님 덕에 정리해 둔 커피머신을 다시 켰다. 리필도 해 달라기에 그건 어렵다고 하고 기계를 닦는데, 손님이 갑자기 버럭 화를 낸다. 내가 스타벅스를 많이 가 봐서 커피 맛을 아는데, 여기 커피는 향도 맛도 없고 그냥 물이란다.

내가 스타벅스나 커피빈을 얼마나 많이 가 본 사람인 줄 아느냐며 손님은 흥분하는데, 미스 김은 우리 다방에서 쓰는 원두 이거 다 사장이 코스트코에 가서 스타벅스 원두를 자루로 사 온 거라는 걸 알지만 그런 말 해 봤자 상황이 별로 나아질 것 같지 않으니 그저 “네, 네” 하며 커피머신을 행주로 문질러 닦는다.

온갖 불평을 주절주절 늘어놓고 있는 손님의 커피 미학을 한동안 듣고 있다 보니 바로 전전 테이블 손님도 좀 이상했던 것 같다. 미스 김이 일하는 가게에서는 여섯 시부터 생맥주 영업을 하기 때문에 낮에는 병맥주만 판다. 4천 원을 받는데, 그렇게 작은 병이 아니기 때문에 술을 끊기 전의 미스 김이었다면 괜찮은 가게라고 생각하며 마셨을 정도다. 하지만 병맥주를 뭐 4천 원씩이나 받냐고, 이 동네는 다 3천 원 받는다고 버럭 화를 내며 나간 손님들도 있었다.

쩨쩨하기로는 어디 가서 지지 않을 미스 김이지만 맥주 한 병에 3천 원 받으라는 건 좀 도둑놈 심보지 싶어서 활짝 웃으며 “그 가게 찾으시면 저한테도 알려 주세요. 꼭 사 마시려고요” 하고 보냈지만, 이번 손님은 4,500원짜리 커피 한 잔 마시면서 톡톡히 그 값을 한다.

4,500원이면 법정 최저 임금을 받고 있는 미스 김의 시급보다도 몇 백 원 많은 값이니 아주 푼돈이라 할 수는 없지만, 손님은 찻값을 던지며 내가 이 돈을 왜 내고 있는지 모르겠단다. “자본주의 사회니까 그렇죠, 손님” 하고 친절하게 말해 줄 수는 없으니 미스 김은 커피머신이 닳도록 행주로 문질러 닦고 있는데, 그이는 미스 김한테 강렬한 한마디를 던진다.

“도둑년!”

졸지에 도둑년이 된 미스 김은 그저 행주질만 한다. 별로 도둑질하고 싶지 않았는데 도둑년이라니 어쩌겠나, 머신이 깨끗해지지도 광이 나지도 않아도 그저 행주질만 한다. 주방 이모님이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어! 소금 뿌려!” 한다. 미스 김은 소금 뿌리러 간다. 딱 배추 숨이 살짝 죽을 정도로만 꽃소금을 살짝 흩뿌린다.

다음 날은 두 개 천 원인 펜을 팔려는 할아버지가 왔다. 난처해서 미스 김이 따라다니며 “사장님 죄송한데요……” 하고 아무리 말해도 들은 척도 안 하고 손님들한테 펜을 팔려던 할아버지는 결국 미스 김한테 “이거 좋은 펜인데, 아가씨 사” 하고 말한다. “사장님 계실 때 와 주세요.” “아유, 그냥 아가씨가 좀 사 줘.” “사장님이 안 계셔서…….” “펜은 사장님만 쓰나? 에이, 아가씨가 좀 사~.”

결국 미스 김은 약간 울컥한다. “할아버지, 저 오늘 벌어도 오늘 입에 풀칠도 못해요. 할아버지처럼 현금 장사 하는 거 아니잖아요.” 할아버지는 움찔하더니 펜 팔기를 포기하고 냅킨을 한 무더기 쥔다. “그럼 이것 좀 가져갈게.” “네, 가져 가세요…….” 결국 미스 김은 얼마나 지속될지 모르는 평화의 대가로 5센티미터 두께의 1회용 냅킨을 지불한다. 냅킨 정도로 평화를 계속 살 수 있으면 좋겠지만 보장은 없다.

저쪽에서 단골인 ‘마포구 할아버지 연합’ 손님들이 미스 김을 부른다. “미스 김! 좀 전에 나왔던 노래 있지?” 시디는 사장이 구운 한 장만 계속 트는데, 김범수의 <보고 싶다>를 경음악으로 편곡한 것에서부터 디즈니 만화 영화 <인어 공주> 주제가, 쇼팽의 클래식, 영화 <씨네마 천국>의 삽입곡까지 이것저것 실려 있어 좀 전에 나온 노래가 뭔지 생각하려니 오래 걸린다.

“미스 김! 왜 그것도 몰라? ‘비는 사랑을 타고’ 말이야!” 비는 사랑을 타고라는 노래가 있었나, 생각하니 마포구 할아버지 연합은 우산을 휘두르며 말씀하신다. “이거 말이야. 아임 싱~잉 인 더 레인~ 아임 싱~잉 인 더 레인…….” ‘사랑은 비를 타고’ 아니었나 잠깐 생각하다가, 비가 사랑을 타든 사랑이 비를 타든 뭐가 뭘 타든 무슨 상관인가 싶어 달려가서 음악을 바꿔 튼다.

60대 정도의 여자 분 한 분과 남자 분 두 분이 들어와서 냉큼 주문을 받으러 간다. 남자 분이 먼저 “난 냉커피” 하자, 여자 분은 라떼를 드시겠단다. 다른 남자 분이 “그럼 난 투미” 하셔서 커피 한 잔과 카페라떼 두 잔을 내가는데 라떼 한 잔 위에 우유 거품 색깔이 제대로 안 났다. 보기가 그런 거지 우유가 덜 들어간 것은 아닌데 손님은 못마땅하다. “여봐, 아가씨. 내 껀 이 위에 흰색이 너무 없잖아. 같은 건데 왜 이래!” “손님, 보기만 그렇구요, 이것도 우유 거품이…….” “아, 잘 봐. 두 개가 완전 다르잖아!”

미스 김은 배짱 장사를 하기로 한다. “손님, 이쪽 손님께서 주문하신 건 라떼구요, 손님께서 주문하신 건 ‘투미’예요. 엄연히 다른 메뉴인데요…….” 생글생글 웃으며 당신은 투미를 시켰지 않냐고 우기니 고등학교 생활지도부 선생님처럼 꾸짖던 손님은 이내 피식 웃고 다른 손님들도 한바탕 웃고 대강 넘어간다. 요 몇 달 동안 미스 김이 새로 배운 게 바로 생글생글 웃는 법이다. 전에는 죽어도 못하던 짓이다. 목이 탄다. 투미 한잔 만들어 마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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