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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김의 하루(<작은책> 2010년 6월호)

김현진/ 에세이스트

 

‘녹즙 아가씨’에서 직함이 하나 더 추가됐다. 그 이름이 무언가 하니, 바로 ‘미스 김’. 골치 아픈 일들이 생기고 쓸데없는 구설수에 오르면서 더 한가한 게 죄다 싶었다. 사람이 저지르는 모든 어리석은 일들의 원인을 좁혀 보면 딱 두 가지다. 외로워서, 아니면 먹고살려고. 심심하거나 배고파서 온갖 바보 같은 일들을 저지르게 된다.

 

나도 늘 그랬다. 심심하지 말아야겠다, 사람이 아침 해를 보며 일어나 해가 질 때까지 열심히 일하고 집에 돌아와 푹 잠드는 건강한 생활을 하면 남의 일에 신경 쓸 시간이 없을 텐데 싶어, 일단 나부터 그러기로 하고 홍대 앞에 있는 카페에 취직했다.

 

홍대 앞에 있는 카페라고 해서 아기자기하고 예쁜 인테리어에 젊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오밀조밀한 카페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저녁 여섯 시가 지나면 커피 머신을 끄고 오디오에서 경음악 시디를 빼고 애들이 좋아하는 가요 씨디로 바꿔 틀고 튀김기를 켠 다음 트랜스포머처럼 호프집으로 변신한다.

 

버드와이저와 오비맥주 포스터, 소주 브랜드 광고 모델 ‘유이’의 사람과 같은 크기의 포스터 옆에 도자기로 만든 다소곳한 백작 부인 인형이나 커피 원두 병 같은 것이 놓여 있는 국적 불명의 ‘주간 커피 야간 맥주’인 이 가게의 낮 시간 손님들은 주로 50대에서 70대를 넘나드는 어르신들이다.

 

 “미스 김, 나 아메리칸 커피 하나.” “나는 카푸치노로 줘.” “미스 김, 오늘 어디 가나?” 미스 김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활짝 웃는 얼굴로 12시부터 6시까지 커피를 나른다. 아침 6시부터 녹즙을 나르니 손가락을 꼽아 보면 하루 열두 시간 노동하는 셈이다.

 

녹즙 배달도 처음에는 배달이 7이고 영업이 3이려니 했는데 웬걸, 영업이 7에 배달이 3이다. 미스 김은 입이 안 떨어진다. 시음료에 빨대를 꽂아서 내밀면 쳐다보지도 않고 “아, 저리 치워요” 하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제 익숙하다. 미스 김은 회사 다니던 시절을 생각하며 노래를 흥얼거린다. “괜찮아요, 나도 예전엔 누구의 마음 아프게 한 적 많았죠…….” 내가 그때 “저 그런 거 안 먹는다니까요” 하며 야멸치게 뿌리쳤던 녹즙 아줌마가 몇 명이던가.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한 미스 김은 그동안 세일즈에 관련된 책을 오십 권쯤 읽었다. 그러다 보니 재미있는 점들이 있었다. 유명한 세일즈 교육가는 유명한 ‘동기 부여’ 강사일 경우가 많다. 이들은 연애 관련 서적도 종종 쓴다.

 

그도 그럴 것이 연애와 영업은 신기하게 비슷한 구석이 많다. 첫째는 인사이드 마케팅, 내부 교육이 철저히 돼야 한다. 자기 스스로를 좋아하지도 않고 자신이 없는 사람이 이성에게 매력적이지 못한 것처럼, 세일즈맨 스스로가 좋아하지 않는 상품을 팔 수는 없다. 다행히도 나는 내가 파는 녹즙을 좋아한다.

 

두 번째는 손님, 또는 이성의 거절을 개인적 거절로 받아들이지 말 것. 세일즈에 관한 수많은 책들은 입을 모아 손님에게 상품을 권했다가 거절당했을 경우 자기 자신이 거부당했다고 생각해서 의기소침해지는 것이 세일즈맨이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이라고 말한다.

실은 남자 문제도 마찬가지다. 용기 내서 들이댔다가 반응이 신통찮으면 여자들은 자신에게 수천 개의 화살을 돌린다. 오늘 옷이 별로였나? 역시 여자가 먼저 들이대면 안 돼. 내가 눈이 너무 작아서, 코가 너무 커서, 몸무게가 3킬로그램만 덜 나갔다면 좋았을 걸, 조금 더 예뻤더라면 어떨까, 직업이 좀 괜찮으면, 기타 등등 할 수 있는 자기 탓은 끝도 없이 많다(남자들은 훨씬 더 긍정적이다. 저 여자 뭘 잘못 먹었나 보다 생각하고 얼른 현명하게 발을 빼니까). 하지만 그게 그냥 나쁜 ‘때’였을 경우도 있는 거였다. 그 남자가 바쁠 때이거나, 기분이 안 좋거나, 뭘 잘못 먹었거나 뭐 어쨌거나 여러 가지 기타 등등.

 

세 번째, 모든 건 어차피 확률 게임이다. 전단지 열 장 돌리는 것과 천 장 돌리는 것 가운데 고객이 될 만한 사람을 만날 확률은 당연히 천 장 쪽이 더 높다. 텔레마케팅의 경우 무작위로 23명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응답을 받을 확률은 그 가운데 7명이라고 한다. 23명의 남자를 만나 봤자 뭔가 불꽃이라도 일어날 확률은 그 가운데 고작 7명인 것이다. 그러니 가뭄에 콩 나듯 남자를 만나 봤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는 건 당연한 것, 고객이든 남자든 구경이라도 많이 해야 내 것 될 확률이 높아지는 거였다.

 

하지만 단 하나만은 결정적으로 달랐다. 많은 세일즈 전문가들은 좋은 성적의 비결을 ‘고객을 빚진 상태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고객에게 호의를 자꾸 베풀어 고객이 자꾸만 받게 하고, 따라서 고객을 세일즈맨에게 빚진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이란 존재는 받으면 어느 정도 돌려주어야 한다는 의식이 있기 때문에 세일즈맨과 고객 사이의 거래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것인데, 연애에서는 ‘빚진 상태’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잘해 주고 잘해 주고 또 잘해 줘 봤자 상대는 우쭐해질 뿐이다. 세일즈맨에게 호의를 받은 고객은 ‘저 사람 참 친절하네’, ‘너무 잘해 줘서 미안하다’ 하고 생각하지만, 끝도 없이 퍼주는 연인은 상대의 목에 깁스를 둘러 주는 꼴이다. ‘저렇게 잘해 주는 걸 보니 내가 진짜 좋은가 보다.’ ‘내가 얼마나 좋으면 저럴까.’ ‘아주 나한테 죽네, 죽어.’ 빚 따위는 없다. 내가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이다. 저렇게 나한테 잘하는 이유는 내가 당연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서 저러지, 그것 말고 무엇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받는 건 자꾸만 당연해진다. 제가 뭔가 아쉬우니 나한테 이러겠지. 콧대도 점점 높아진다. 사랑에는 빚이 없다. 아쉬운 사람만 있을 뿐.

 

새벽에는 녹즙 리어카를 끌고, 점심 저녁에는 커피 쟁반을 나르면서 미스 김은 생각이 많다. 책상머리에 앉아 있는 것보다 많이 배운다. 평생 할 줄 몰랐던 영업이라는 걸 하면서 미스 김은 많이 웃게 됐다. 즐겁기 때문에 웃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자꾸 웃다 보면 즐거워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앞으로도 더 배울 것이 차고 넘칠 것이고, 미스 김은 조금 기대되기도 하고 조금 무섭기도 하다. 부디, 살살 배웠으면. 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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