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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죽음명상에 딱이야 (월간해인 재탕)

2010.05.06 10:53

약초궁주 조회 수:2396 추천:393

 

컴터앞에 원고 숙제만 하려고 앉으면

(새벽에 일어나긴 했음)

 

밀린 메일 답장 쓰고.

홈피눈팅하고

 

딴짓으로 흘러흘러가버리니 원.

 

 

그러다가 불현듯 전에쓴

원고가 생각났고.

죽음의 공포도 되살아나고

 

요렇게 딱부러지게 글썼던 마음도

헤벌레 풀어져버리고....

 

실은 글이란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하지. 마음을 다스리려는.

 

 

월간 해인 ‘휴가? 죽음 공부에 딱이야’

 

 

 

혼자 생쑈를 했다. 한달 쯤 전 잠들려는 밤. 사타구니에 도토리만한 혹이 잡혔다. 우연하게 만져진 딱딱한 멍울은 전혀 아프지도 붓지도 않았다. 염증도 없고 임파선도 아니니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 이런 혹이 더 수상쩍은걸 아니까 불안감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혹시 암이 아닐까. 진짜라면 얼마나 아플까. 평소 남들에게 명쾌한 조언과 잔소리를 아끼지 않는 직업인데 정작 병이 내게 닥친다면 고통을 극복할수 있을까. 자신 없었다.

 

알량한 품위는 바닥을 칠게고 두려움에 무너질게 뻔했다. 고상한척 작동 중이던 이성을 제끼고 원초적 본능만 남아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적나라한 진면목을 보여주겠지. (眞如)

 

원래 나의 희망 묘비명은 ‘팔팔하게 놀다 길에서 죽다’이다. 마포 최초의 관광계 ‘오야’였던 외할머니, 환갑에 대청봉 3회 등정에 지리산 종주를 하신 어머니의 혈통을 이어받은 나. 그 핏줄이 어디 가랴.

 

사주마저 역마지살이 중중해서 자리 깔고 환자 보는 게 참 용하다고 사부는 혀를 차셨는데. 팔팔 이라는 기대 수명은커녕 몇 년밖에 못살면 어쩌나 아니 일년 밖에 안 남았다면...절박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인생 대차대조표 혼자 문제를 내고 답안지를 써내려갔다. 당장 죽는다면 가장 아쉽고 안타까운 것은? 죽기 전까지 해야만 하고 꼭 하고 싶은 건 뭘까?

 

명 짧은 것에 대한 원망?

 

닭은 태어나서 겨우 한 달도 못 산걸 잡아먹었고 돼지는 반년 만에 소도 삼년을 못 채우고 지지고 튀기고 볶아서 내 뱃속에 꿀꺽 하지 않았던가. 나 살자고 짐승들을 학대하고 착취했을 뿐만 아니라 남들의 노동과 피땀으로 연명했으니 뻔뻔하게 원망할 처지가 못 되었다.

 

 

가족들의 슬픔?

 

부모가 끼고 몇 십 년씩 물고 빠는 건 인간밖에 없다. 동물들은 새끼들과 1-2년 안에 거의 다 헤어진다. 평생 만나지도 못한다. 생노병사의 고통으로 도가 튼다면 말 못하는 짐승이 먼저리라. 자식들이야 울고불고 하겠지만 어미 따라 무덤 속에 뛰어 들겠는가 알아서 제 앞길 가겠지. 다만 노모 앞서는 게 불효막심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하고 싶고 꼭 해야만 할 일은?

 

거의 모든 설문 조사에 사람들이 꿈꾸는 소망 1위는 ‘여행’이란다. 영화 버킷리스트에 보면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남자환자 둘이 마지막으로 세계의 경승지를 여행하며 도전을 한다. 곰곰이 궁리했지만 나는 10대 불가사의나 인도의 타지마할, 이집트의 스핑크스같은 압도적인 경치나 건축물을 못 봤다고 애석하지는 않았다.

 

하고 싶은 일이라면 트럭타고 산기슭과 강 언덕따라 장터를 돌고 국밥 한술에 침도 놓으며 로드 무비 찍기. 인연 따라 사람과 이 땅을 흠뻑 만나며 한가롭게 떠돌고 싶은 꿈을 꿨었다.

 

 

꼭 해야만 할일?

 

호주제 폐지운동에 김밥도 날랐고 ‘꽃피는 자궁’ 책을 써서 중국 대만 일본에 이어 태국까지 수출을 했으니 공부 숙제 웬만큼 했다. 요즘은 불쌍한 우리나라 남자들을 위한 건강서를 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나 아니면 더 예쁜 누나가 쓰겠지.

 

사랑과 연애에 대한 미련과 한?

몸 되고 시간 될 때도 지지부진했던 걸 이제와 누굴 탓하랴.

 

 

문득 마흔 살에 유언장을 썼던 일이 떠올랐다. 어둔 밤길에 등불하나 들고 한치 앞도 가늠 못하면서 홀려 걷는 게 인생이니 혹여 마음준비 없이 하직하면 어린 자식들이 애통할까 싶어서 그랬다.

 

어두운데 불을 켜고 벌떡 일어나 장롱 깊은 곳 서랍을 뒤져 열네 살 아홉 살 남매에게 ‘사랑하는 엄마가’라고 쓴 걸 찾아냈다. 원고지에 만년필로 정성들여 쓴 편지.

 

엄마 없더라도 서로 의지하고 도우면서 살아라...책 많이 읽고...보험은 어디에 들어 놓았고...마지막은 할머니 잘 모시라는 당부까지 써내려가다 보니 예행연습이건만 혼자 슬픔에 북바쳐 눈물 콧물이 한강수였던 기억이 새롭다. 한글 깨치고 구구단 외우고 혼자 버스타고...뻥 튀기듯 자라서 대학만 가도 고맙겠단 생각이었는데...

 

 

유언장을 읽는 동안 다시 가슴이 저리긴 했으나 참으로 놀라웠다. 내 몸 작은 공간이 몽땅 버무려진 오욕칠정 덩어리였는데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자글자글 들끓던 백팔번뇌가 어디로 간 것일까. 숨어버렸나 휘발되어 날아갔나. 호흡 명상 걷기에도 날파리처럼 윙윙거리던 번뇌 망상이 죽음 그 칼날 같은 준엄한 경계에서야 오롯하게 명료한 의식만 남겨놓다니. (直指)

 

그제서야 평생 누렸던 새 아침 새날 눈뜸이 우연을 가장한 한량없는 우주의 선물임을 알아챈다. 황급히 정리하려던 뒷일도 미래의 작전짜기도 다 부질없는 일.

 

남은 이들이 어련히 알아서 할까 걱정까지 가불하는 못 말리는 ‘다정도 병’이라니. 우스울 지경이었다. 오히려 생애 이 언덕까지 밀어 올려준 배움과 기쁨, 한없는 사랑에 엎디어 절해야 하지 않을까?

 

더듬더듬 생각이 미친다. 내가 이토록 두려울 진데 고통을 겪고 있는 자궁, 난소에 혹이 생긴 환자들은 말해 무엇하랴. 선생노릇 제대로 해야겠다.

 

도토리만한 멍울 하나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일어 드디어 자비와 연민으로 아픔에 공감하고 위로하는 의자(醫者)가 되겠다는 착한 다짐에 이르렀다.

 

 

긴 밤 지새우고 이튿날 출근. 정신무장도 한 터라 기분도 새로운데 아기도 안 낳았는데 무려 12cm 혹이 있다는 진단으로 사색이 된 환자가 찾아왔다. 나와 산부인과 의사의 협진으로 문제는 있지만 혹이 없음을 확인했다.

 

“로또당첨 맞았네요”라며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그녀.

 

스피노자가 옳았다. 나도 사과나무 대신 한명의 환자라도 아픔을 위로하고 눈물을 닦아주고 싶다. (하루 한명 하고는 다툴지라도)

 

느닷없이 출몰한 몸속의 미확인 물체U.F.O는 울퉁불퉁한 마음 밭을 갈아엎고 소문없이 조용히 사라졌다. 쓰고 보니 납량코미디다.

휴가? 한 여름 밤 죽음명상에 온 세상이 환하다.

 

2008-08-06 10:39:20 / 218.237.8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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