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yakchobat.com/files/attach/images/672/25ac150166d1c1b79cef64f80f51bc28.jpg
  logo    
먹고! 읽고! 걷고!
게시판 성격에 맞지 않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삭제되거나 이동 될수 있습니다



돈주고 저주를 산 미스김 (작은책 김현진)

2010.10.12 14:35

약초궁주 조회 수:1831 추천:267

돈 주고 저주를 산 미스 김(<작은책> 2010년 8월호)

김현진/ 에세이스트

 

미스 김은 다방을 잠시 쉬기로 했다. 하루 감정 노동만 열다섯 시간. 써야 할 글들이 들어오면서 녹즙 배달만 다섯 달, 다방 아르바이트 두 달이 넘은 미스 김은 감정 노동을 열다섯 시간씩 하면서 이 글들은 쓸 수 없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마침 방학 때 등록금을 벌어야 하는 후배한테 아르바이트 자리를 잠시 물려주기로 했다.

 

녹즙 배달도 피곤한 일들이 점점 많아진다. 이를테면 회사에서 녹즙을 받아 먹던 사람이면 퇴사를 할 때 녹즙도 안 먹겠다고 알려 주고 미납 요금도 청산하고 가면 좋은데 그냥 내뺀다. 하다못해 퇴사한다고 알려주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미스 김이 녹즙 손님이 퇴사했다는 걸 알아차릴 때까지 계속 녹즙은 나오고, 결국 아무도 먹지 못한 채 아까운 녹즙만 버려지고, 그 녹즙 값은 미스 김이 덮어써야 하는 것이다. 억울한 것도 억울한 거지만 미스 김은 아무도 먹지 못한 녹즙이 너무 아깝다.

 

퇴사 안 해도 이제 그만 먹겠다고 하는 손님도 당연히 있는데, 그 가운데는 녹즙 값 달라고 난리 칠 때까지 모른 척 입 닦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다. 애들 분유값도 한창 들 때라 돈 생기면 주겠거니, 하고 모른 척해 준 손님 누구가 있었다. 그이한테는 달라고 난리 치지 않는 미스 김의 배려 따위 그냥 멍청한 거였다. 이런 것 다 받으러 올 때까지 모른 척하면 안 주고 입 닦을 수 있다고, 그쪽에서 가만히 있는데 굳이 낼 필요 없다, 달라고 달라고 난리 치면 그때 주면 된다, 하고 뭔가 대단한 노하우를 전수하듯 부하 직원한테 자랑했다고 한다.

 

노동자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구조가 바로 이런 건가 싶어서 미스 김은 어깨에 힘이 쭉 빠진다. 게다가 미스 김은 그 사람도 하청업체를 전전하다가 본인의 노력으로 안정적인 회사에 입사하게 된 사람인 걸 모르지 않는다. 못난 놈들끼리는 얼굴만 봐도 흥겹다는데 요즘 못난 놈들끼리는 얼굴만 봐도 뜯어먹을 궁리만 하는 모양이다.

 

미스 김도 어쩔 수 없이 달라고 달라고 난리 난리를 쳐야 할 것 같다. 녹즙 값 떼먹고 튄 사람들 이름을 다 대자보에다 써서 엘리베이터에 붙이라고 누가 그런다. 그럴 수야 없고 미스 김의 손님들은 대부분 좋은 사람들이지만 방금 그런 사람들은 정말로 확 써 붙여 버리고 싶었다. 청소 아줌마들은 며칠 나오고 그만둘 줄 알았더니 오래도 한다고 독하다 독해, 한다. 하지만 힘들지 않은 노동이 어디 있을까. 회사 생활 할 때도 이 정도의 스트레스는 늘 있었다. 하지만 스트레스의 종류가 다르다. 말하자면, 미스 김은 ‘여성 비숙련 감정 노동자’다.

 

미스 김이 다방을 잠시 쉰다고 하자 다방 단골 손님들인 할아버지들은 “걔 참 이쁘지?” 했다고 한다. “얼굴이 이쁘다 뭐 그런 얘기가 아니라 애쓰며 사는 것들은 다 이뻐” 하셨다는데, 이런 날 미스 김은 그 말이 별로 반갑지 않다. 애쓰며 살아도 보람 없는 빈곤 노동, 개미지옥처럼 끝날 날 없는 빈곤 노동, 그 가운데서도 감정 노동, 돌봄 노동을 하며 살아가는 여성 비숙련 노동자들은 그다지 예뻐 보이지 않아도 좋으니 애 좀 덜 썼으면 할 것이다. 이 점은 미스 김이 앞으로도 내내 해야 할 고민이 될 것 같다.

 

어쨌거나 지금은 다른 고민이 있다. 미스 김은 친구가 별로 없다. 물론 성격이 나빠서 그렇다. 그 와중에 가장 친한 친구가 결혼을 하니 이것저것 신경 써 주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신랑이 착하긴 하지만 열 살이나 많고, 또박또박 월급 받아 오는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니고, 남자 집에서 방이라도 얻어 주는 게 아니니 마음이 더 쓰여서 미스 김은 객기를 부려 신부 예복을 석 달 할부로 질러 줬다.

 

함께 맥주를 30만 리터쯤 마시며 청춘을 보낸 친구가 아기 엄마가 된다니 마음이 자꾸 쓰인다. 워낙 옷 사는 것도 싫어하는 친구라 웨딩드레스 고르는 것도 귀찮아해서 식을 몇 주 남겨 두고서야 골랐다. 그것도 시들해하는 바람에 미스 김이 같이 가서 온갖 참견을 했다. 무슨 탈지면으로 만든 것 같은 드레스에 리본으로 도배를 해 놓은 정신없는 드레스를 보며 인상 쓰는 것도 미스 김의 몫이었다.

 

신부가 옷 갈아입는 동안 웨딩숍과 연계된 업체 계약서를 넘겨 보며 미스 김은 기절초풍을 했다. 무슨 발걸음 하나 옮기는 것마다 갈피갈피 죄다 돈이다. 웨딩 촬영이니 비디오 촬영이니 이런 걸 다 빼먹고 안 하니 웨딩숍에서도 별로 안 좋아하는 눈치다. 친구가 미스 김한테 부케를 받으라고 해서 그러겠다 했는데, 웨딩샵에서 부케 받으시는 친구분이시냐고, 그러면 꽃 값으로 이십만 원 내고 가시란다. 부케 받고 석달 안에 시집 못 가면 큰일 난다는데, 심지어 그 저주를 돈 주고 사기까지 하게 생겼다.

 

알음알음 알아보니 보통 부케니 혼주 꽃이니 하는 건 웨딩숍에서 서비스로 주는 건데 우리가 워낙 웨딩샵 남는 장사 안 시켜 주니까 얘들이 안면 몰수하고 그냥 꽃 값 내놓으라고 한 거고, 신부도 결혼 처음 해 보는 거니 뭘 몰라서 그런가 보다 한 모양이다. 미스 김은 밀어주는 김에 그냥 확 밀어주기로 하지만 이 웨딩숍에서는 빈정 상해 버려서 딴 데 알아보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뛴다. 축가 불러 주기로 한 사람도 2주 전에 사정이 있다며 취소해 버렸다. 다정도 병이라면 그게 아예 지병 수준인 미스 김은 또 여기저기 전화를 돌린다.

 

그렇게 이리저리 뛰면서 보니 결혼이라는 게 참 피곤한 거였다. 이 친구는 신랑 자취 집에 몸만 들어가는 거니 텔레비전이나 하나 사고 혼수도 안 하지만 예물이라고 받은 것도 없다. 없는 형편에 예단이니 예물이니 안 하기로 자기네끼리 이야기는 했지만, 어른들 맘은 또 그게 아니었다 보다. 상견례 때 예단 이야기를 하니까 안 받겠다는 말이 없더란다. 안 받고 주는 꼴이 되니 미스 김만 옆에서 약이 올라 친구에게 말을 꺼내 봤지만, “어른들 생각이 그게 아니니까……” 하는 말 앞에서는 대거리할 말이 없다.

 

‘말을 말자. 내 결혼도 아닌데’ 하고 이를 갈면서, 미스 김은 내가 결혼할 때는 화장도 내가 하고 머리도 내가 하고 원피스나 하나 사 입고 꽃은 시장에서 몇 개 사 오련다고 마음먹었다. 부조라고 내 줄 사람도 없지만 누가 하면 투쟁 기금으로 어려운 사업장에 밀어주겠다. 말은 다 그렇게 하고 그때 되면 “어른들 생각은 그게 아니니까……” 할까 봐서 분기탱천한 마음에 신랑도 없는 주제에 그 결심을 여기 적어 두니, 부디 <작은책> 독자 여러분이 증인이 돼 주시라.

~~~~

김현진님 결혼때는

증인 하나 추가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03 국선도 첫날-개밥그릇 [3] 약초궁주 2010.10.15 1753
402 가슴뛰는 일을 찾아서~~~ [2] 약초궁주 2010.10.14 1706
401 장미빛 인생을 노래하라. [1] 약초궁주 2010.10.13 1688
» 돈주고 저주를 산 미스김 (작은책 김현진) [1] 약초궁주 2010.10.12 1831
399 인생...좋게 만들려 애쓰지 마라.ㅠㅠ. [8] 약초궁주 2010.10.08 2171
398 로또 임신 추카추카^&* [1] 약초궁주 2010.10.06 1627
397 희망.... [2] 약초궁주 2010.10.03 2286
396 어떤 뇨자의 이력서^^ [1] 약초궁주 2010.10.02 1707
395 도둑년 (작은책...김현진칼럼) 약초궁주 2010.10.01 1563
394 인생이 허기질때 바다로 가라 file 약초궁주 2010.09.29 1527
393 미스 김의 하루 (녹즙아가씨 2탄.김현진, 작은책) 약초궁주 2010.09.28 1833
392 유지나의 씨네콘써트-놀이인간으로 살기 [1] file 약초궁주 2010.09.28 2149
391 들어는 봤나, 지뢀 총량의 법칙 -2- [6] 약초궁주 2010.09.18 1924
390 들어는 봤나? 지뢀총량의 법칙 -1- [1] 약초궁주 2010.09.18 1672
389 여친에게 할말. 못할말 ㅋㅋ [1] 약초궁주 2010.09.17 1673
388 미안하고...고마워요. [2] 약초궁주 2010.09.16 1494
387 추석연휴...28일 화욜 출근합니더 약초궁주 2010.09.15 1796
386 다행과 감동--생각하기 나름 [3] 약초궁주 2010.09.14 1511
385 진실을 원해? 쟤는 말이 없는게 흠이야. [1] 약초궁주 2010.09.11 1722
384 실타래 1-1 [1] 바우꾸리 2010.09.10 1516

side_menu_title

  • 약초밭자유놀이터
  • 먹고! 읽고! 걷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