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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엄마에 그 딸! (김남희 글).

2012.06.21 10:50

약초궁주 조회 수:1522 추천:206

[정동에세이]일흔다섯 대학생 우리 엄마
김남희 | 여행작가 skywaywalke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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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오듯 사각사각/ 뽕잎 갉아먹는 소리 무성해지면/ 누에는 한 잠 자고 두 잠 자고/ 불어난 잠박에 울안의 뽕잎으로는/ 일용할 양식이 모자라/ 어머니는 멀리 뽕 따러 가신다/ 젖먹이 동생을 어린 내게 맡기고/ 집을 떠난 어머니는/ 정분 나눌 님이 따로 있을 리도 없는데/ 밤이 이슥해서야/ 가난만큼 무거운 뽕 부대를 이고/ 불은 가슴 비비며/ 헐거워진 치마 말기 추스르며/ 바위모퉁이를 돌아/ 지친 모습으로 대문을 들어서신다’

엄마가 쓴 ‘어머니’라는 시의 일부다. 가난한 집안의 3남6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나 초등학교만 마치고 집안 살림을 도와야 했던 엄마. 어린 나이에 늘 동생을 업고 다니느라 키가 크지 못했다고 한탄할 만큼 엄마의 사춘기는 무거웠다. 동무들이 학교에 간 대낮,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며 하루를 보냈을까. 어느 날에는 대청마루에 주저앉아 눈물을 쏟으며 학교에 보내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을까.

엄마가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했다는 걸 나는 몇 년 전에야 알았다. 중졸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 엄마는 일흔을 앞둔 나이였다. “칠순에 수학 공부할 용기를 내시다니 우리 엄마 대단하네.” 내 감탄에 엄마는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못 배웠다는 게 얼마나 큰 한인지 너는 상상도 못 할 거야. 학력 위조하는 유명인들의 마음을 나는 알 것 같아.”

우리 삼남매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가정환경조사서에 고졸이라 쓰며 늘 죄 짓는 마음이었을 엄마. 그런 엄마의 뒤늦은 공부에 나는 늘 무심했다. 딱 한 번, to부정사의 용법을 묻는 엄마에게 5분 만에 짜증을 내며 설명을 그만둔 게 내 관심의 전부였다.

내 무관심과 상관없이 엄마는 몇 년에 걸쳐 중졸, 고졸 검정고시를 통과했다. 엄마가 대학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 모진 나는 엄마를 몰아세웠다. “대학을 나와서 뭐 하시게요? 그깟 학위가 왜 필요한데요? 난 다시 태어나면 대학 따윈 안 가요.”

엄마의 대학행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동생과 달리, 나는 등록금 한 푼 안 보태드리면서 대학무용론을 떠드는 한심한 딸이었다. 내 반대에 굴하지 않은 엄마는 올해 방송통신대학 국문과에 입학했다. 일흔다섯 나이에 대학생이 된 엄마.

얼마 전, 부모님을 모시고 점심을 먹었다. 대학생활이 기대한 대로냐고 물었더니 엄마는 볼을 붉히며 답했다. 너무 행복하다고. 하루하루가 설렌다고. 엄마가 학교에 가는 날, 하루 종일 혼자서 구멍가게를 지켜야 하는 아빠는 마누라 잘못 만나서 늘그막에 고생이라고 하셨지만 그리 싫지 않은 말투셨다. 새로 태어난 것처럼 맑은 얼굴로, 소녀처럼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학교에 다닐 엄마를 생각해본다.

돋보기 안경을 쓰고, 수전증을 앓는 손으로 힘들게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을 엄마. 과제는 제대로 작성할 수 있는지, 젊은 학생들과 어울리기는 하는지, 이런저런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늘 그래왔듯 엄마는 조용히 잘 해낼 것이다.

딸인 내가 이런 말 하기는 쑥스럽지만, 엄마는 내가 ‘교양’이라고 믿는 덕목을 고루 갖춘 분이다.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어떤 자리에서나 겸손하고, 섣불리 판단하기보다는 이해하려 애를 쓰고, 자식들과의 관계에서도 부모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말을 하며 당신의 못 다 이룬 꿈을 자식들에게 강요한 적도 없다.

엄마는 대여섯 정거장을 걸어다니며 버스비를 아끼는 빠듯한 삶을 살면서 늘 책을 읽고, 시를 썼다.

그 시절, 나는 우리 엄마가 구멍가게를 하면서도 책을 읽는 사람이라는 게 참 좋았다. 문화센터에 다니며 시를 배운 엄마는 자비출간이지만 어쨌든 세 권의 시집을 내기도 했다(그 엄마의 시를 고르며 나는 가차없이 ABCD를 나누며 등급을 매겼다). 이런 엄마에게 학사 학위가 왜 필요한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지금의 대학이 엄마에게 어떤 가르침을 줄 수 있을지, 그 이름만큼 큰 배움터가 될 수 있을지도 나는 회의적이다. 하지만 대학이 엄마에게 줄 수 있는 것들이 별로 없다 해도 엄마는 그 안에서 엄마만의 값어치를 찾아내고 말 것이다. 아무리 고단한 일상이라 해도 시를 읽는 마음을 잃지 않았던 것처럼. 40년 넘는 세월을 자식들 먹여 살리느라 지칠 법도 한데, 여전히 자신을 놓지 않고 있는 엄마. 삶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 예민한 감수성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엄마는 끝없이 자기를 쇄신하며 배움에의 열망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런 엄마를 보며, 산다는 것은 평생토록 배우는 과정임을, 호기심이 죽고 열정이 사라지는 순간, 인간은 늙는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여행을 하며 나는 지구의 반대편에서 만난 참혹하도록 가난한 현실에 분노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내 기준으로 그들 삶의 행복지수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법도 배웠다.

세상에는 ‘시궁창에 발을 딛고 있더라도 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 탓을 하며 자기를 포기하기보다는 스스로 변화를 일구어 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기에 이십 몇 년의 세월이 흘러 일흔 다섯이 될 나에게 내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끝까지 나 자신으로 남는 것. 그리고 여전히 하루가 짧다고, 아직은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다고, 인생이 참 살아볼 만한 거라고 중얼거리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나의 엄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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