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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김규항 : 오늘이 인생이다.

2010.05.09 08:35

유재언 조회 수:1121 추천:131

오늘이 인생이다.

 

-김규항

 

고등학교 시절, 수업만 들어오면 “내가 선생질이나 하며 썩을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따위 한탄이나 늘어놓는 교사가 있었다. 그는 학교에서 가장 학벌이 좋은 교사였지만 동시에 학생들에게서 가장 경멸받는 교사였다. 어느 날 그가 말했다. “계집애 만나러 다니고 고고장 가고 하는 건 대학 가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걸 지금 못해서 안달하는 새끼들이 있단 말이지.” 사람 같아야 상대를 하지, 다들 그가 무슨 소리를 하든 잠자코 있는 편이었는데 그날은 한 녀석이 큰 소리로 말했다. “그때 하는 거 하고 지금 하는 거 하고 같습니까?” 수업은 중단되고 녀석은 교무실로 끌려가 종일 곤욕을 치러야 했지만 녀석의 말은 내게 남았다.

 

한국 부모들은 대개 아이의 인생을 준비기와 본격기로 나누는 경향이 있다. 그들에게 아이의 스무 살 이전의 인생은 단지 스무 살 이후의 본격기 인생을 위한 준비기 인생인 것이다. 그들은 아이의 본격적인 인생, 즉 스무살 이후 인생을 위해서라면 스무살 이전 인생에서 느끼고 체험하고 배워야 할 것들을 생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 건 그들에게 스무살 이전의 인생은 다신 오지 않는 이미 지나버린 것이기에, 단지 스무살 이후의 인생에 남긴 ‘현실적 영향’으로서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스펙을 따지지 않는 사랑, 아무런 조건이 없는 우정 같은 인생의 이런저런 순수한 국면들을 잃어버린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그런 부모들 덕에 한국의 아이들은 19년의 인생을 잃어버렸다. 놀아야 할 시기에 놀지 못하는 아이들. 조화로운 인격과 사유하는 능력을 키워야 할 시기를 생물학적 생존에 필요한 시간을 빼곤 모조리 경쟁에 바친 아이들이 정상적인 사람으로 성장한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경쟁에서 이기든 지든 상관없이. 우리는 이미 언어의 9할이 욕인 초등학생들에 대해, 일상적인 대화가 어려운 중학생들에 대해, 스펙을 기준으로 이성 친구를 고르는 고등학생들에 대해, 교수에게 “엄마한테 물어봐야 해요”라고 말하는 대학생들에 대해 듣고 있다.

 

연원은 박정희 군사독재부터일 것이다. 박정희 씨는 민주주의를 파괴했을 뿐 아니라 한국인들에게서 인생을 빼앗아갔다. 그는 18년의 독재 기간 내내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오늘을 생략할 것을 강요했다. 한국인들은 그의 말대로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열심히 일했고 그 덕에 이른바 ‘세계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기도 했다. 문제는 그들이 그런 과정을 통해 오로지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서만 살아가는 습성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1년 후, 5년 후 , 혹은 10년 후에 좀더 행복하기 위해서 정작 단 하루의 오늘을 행복하게 지내는 걸 불편해하는 이상한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이 미래를 계획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 살인적인 경쟁 체제에서 아이의 10년 후를 근심하는 것 또한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인생은 바로 오늘이라는 것, 오늘을 생략한 채 얻을 수 있는 미래의 오늘은 없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 오늘 아이가 마음껏 뛰어노는 걸 생략한다면 10년 후 아이는 몸도 마음도 병들어 있을 거라는 걸, 오늘 아이와 한가롭게 눈을 마주보며 대화하는 시간을 생략한다면 10년 후 완벽한 조건을 가진 아이는 나를 비지니스 파트너처럼 바라 볼 거라는 걸, 오늘 저녁 식구들이 소박한 집에 둘러앉아 단란하기를 생략한다면 10년 후 몇 배 큰 저택에서 식구들은 모두 서로에게 하숙생들일 거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

 

출처:한겨레(ww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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