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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당신에게 한 송이 꽃을

2009.04.02 22:47

강위 조회 수:1321 추천:199

 

하루에 수차례 화장실에 가고, 한 달에 한 번 생리통에 시달리지만 내 몸에 ‘구멍’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살진 않는다. 그 구멍은 미디어를 통해 전해지는 흉흉한 사건들에 의해 자각된다. 이를테면, 연쇄 성폭력 살인사건이나 연예인 성상납 사건 같은 것들. 무차별적으로 이어지는 뉴스 보도에 노출된 구멍은 오들오들 떨거나 움츠러들고, 억울함에 치를 떤다. 때로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만든다. (이 험한 세상에 왜 하필 여자로 태어났단 말인가!)

 

폭력은 ‘구멍’을 공략하는 한 마리 뱀 같다. 내가 속한 현실 속에서 녀석은 대낮 지나가는 행인을 유인해 온몸을 유린한 뒤 죽이고, 늦은 밤 불러내 술을 따르게 하고 인형처럼 주물러 스스로 생을 마감하게 한다. 그러던 녀석은 일순 몸을 부풀려 불을 뿜는 용으로 변신, 건물과 도로와 집과 사람들을 불태운다. 평범한 여성들에게서 일상을 빼앗아 분쇄기로 갈아버린 다음, 폐허로 내던진다. 온통 너덜너덜해진 이들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아닌 현실 속에서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를 놓고 고민해야 한다.

 

굳건한 의지로 생을 이어가는 것은 대단한 일이며 충분히 감동적이다. 하지만 폭력에 노출된 피해자가 죽고 사는 것이 전적으로 개인의 문제일 수 있을까. 견디지 못해 생을 저버린 사람에게는 안쓰러움을 던지고, 이를 악물고 버티는 사람에게는 박수 쳐주고 떠나버릴, 그런 문제일까.

 

 

"죽일 필요 없어. 어차피 자살할 테니까.”

 

<우리가 희망입니다>, 자이납 살비, 권인숙․김강 옮김, 검둥소, 2009 </SPAN>

 

 

보스니아 무슬림 지역에 사는 ‘사페타’는 세르비아 군대가 이 지역을 습격하면서 ‘한 때 이웃이었던’ 이들에게 끌려가 여러 차례 강간당했다. 그들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죽일 필요 없어. 어차피 자살할 테니까.” 하지만 그는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들이 자신의 몸도 영혼도 죽이지 못했고, 앞으로도 절대 그럴 수 없을 거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시간과 공간, 파급력을 달리하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신체와 존엄을 유린당한 사람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래도 살아야지’라고 허울 좋은 말이 아니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손길이 이들을 적극적으로 살아내도록 만든다. 평화인권브랜드 ‘검둥소’에서 펴낸《우리가 희망입니다》는 전쟁의 피해를 온몸으로 겪고도 굳건히 살아가는 여성들의 육성을 담아내고 있다.

 

이 책의 서문에서 앨리스 워커는 “무지와 평화가 공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가장 힘든 방법으로 체득한 우리들은 자신과 딸을 위하여 지식을 얻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를 통해 “우리를 침묵하게 했고 존중하고 감사하는 마음 없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썼던 사회, 그 어떤 사회보다 나은 삶의 방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여성을위한여성’은 이를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비정부기구로, 이곳의 지원을 통해 여성들은 피해자를 넘어서 당당한 생존자로, 활동적 시민으로 거듭난다. 이들은 일상적 폭력을 깨닫고, 상처를 치유하며, 새로운 기술을 배워 농장을 경영하고, 물건을 만들고, 생을 이어간다.

 

또한 이들은 강간의 경험을 개인의 수치로 환원하지 않고 사회적 문제화한다. 2003년 콩고에서는 한 무리의 여성들이 공개 무대에서 발가벗은 채 자신들의 몸을 드러내고 외친다. “우리를 강간할 거면 지금 하시오. 강간은 지금 이후에는 멈추어져야 하기 때문이오!”

 

 

끝나지 않은 싸움 ……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일본군 성노예 생존자 ‘송신도’ 할머니의 다큐멘터리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자신이 폭력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가장 내밀한 곳에 자행된 폭력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말한다. 자신의 상처에 대해, 자신을 짓밟은 힘에 대해. 그들은 정중한 사과와 제도적 개선을 원한다. 그 뿌리에는 자신이 겪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원하는 절절한 바람이 새겨져 있다.

 

10년 세월 동안 일본 정부를 상대로 ‘사과’를 요구한 송신도 할머니. 다큐멘터리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에는 할머니를 처음 본 사람들의 당혹스러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녀는 세상이 규정지은 피해자의 전형성에서 빗겨서 있다. 할머니는 거칠게 보이리만큼 당당하고, 담담하다.

 

 ‘재일 위안부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에 대해서도 무조건 신뢰하거나 고마워하지 않는다. 할머니는 의심하고, 회의하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간다. 지원 모임 참가자들 역시 할머니와 함께 변화, 성장해나간다. 긴 세월 홀로 견뎌내면서 흉터가 되어버린 상처에 움이 트고 새로운 싹이 트는 과정, 이 같은 치유의 과정이 있었기에 ‘잘못을 하긴 했지만 사과는 할 수 없다’는 일본 정부의 희안한 논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사과를 받아내겠다는 목표를 달성하진 못했지만 이들은 패배하지 않았다. 송신도 할머니와 그리고 그를 지지한 사람들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이 모든 과정은 ‘함께’ 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춤추며 노래하는 꽃밭

 

이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다시 ‘구멍’을 바라본다. 잔뜩 찌푸린 채 움츠리고 떨고 있던 나의 구멍이 조금은 빡빡해진 느낌이다. 구멍은 진정 나약한가? 아니다. 그것은 비어있음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생산하는 창조적 공간으로 존재한다. 수많은 여성들이 온몸으로 해답을 제시하고 있지 않은가. 애초에 구멍을 가진 것이 문제일까? 이것도 아니다. 문제는 구멍을 함부로 훼손하는 몰이성과 폭력, 그것을 두둔하는 제도, 그로 인해 이익을 취하는 이들이다. 모든 여성이 잠정적 피해자가 아니듯, 모든 남성 또한 잠정적 가해자가 아님을 명심하지 않으면, 자칫 연대 가능한 대상과 저항의 대상을 오판할 수도 있다.

 

살아냄으로써 저항하는 이들의 심장은 붉고 힘차다. 나는 그 붉은 꽃밭에 꽃을 한 송이 심어주고 싶다. 골방에서 혼자 울고 있는 이, 생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서성이는 이들을 붉은 꽃밭으로 끌어내고 싶다. 그들과 함께 흐드러지게 핀 꽃들을 바라보며 춤추며 노래하며 녹록하지 않은 생을 이겨내고 싶다. 우리가 가진 구멍을 미워하지 않으며, 우리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고, 마주보며 깔깔대며 웃으면서, 이렇게 살아내는 우리에게 진심어린 박수를 쳐주고 싶다.

 

 

 

* <문화미래 이프>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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