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은 아직 빙하(氷下)의 시간이다
이경자(한국작가회의이사장)
그해 봄날들의 하루하루는 얼마나 추웠는지. 뜰에 핀 꽃잎이 움츠러든 게 사람 탓 같아서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한편 나의 뱃속 자궁에선 사람이 자라고 있었는데 그 생명조차 느낄 수 없도록 강렬한 공포에 짓눌려 지내야 했다. 내가 한 번도 데모대의 선봉에 서지 못했다는 것, 잡혀가지 않았다는 것,그리고 광주에 있지 않았다는 것.
하지만 나는 전라도 사람이 아닌 것과 전라도에 연고(緣故)가 전혀 없다는 사실에 깊이 안도했다. 이 상반된 감정의 파고가 나를 미치게 만들렀다. 피난처를 원하는 수배범들을 친구 둘에게 떠넘기고 그것이 들통날까 봐 밤마다 잡혀갈 대를 대비해서 한겨울 차림을 하고 불면의 시간을 보낸 나의 비겁한 모습을 고백한다.
정말 나는 전라도 사람이 아니고 광주 사람이 아니며 친인척 중에〈광주항쟁〉과 인연 지어진 사람이 없다.그래서 편안한 구경꾼이 되었나?행복한가?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이 되어서 광주〈5월문학제〉에 오느라 축사를 써야했다. 내가 축사를 쓸 자격이 있나?
모니터 앞에서 피 냄새를 맡는 기분으로 반문(反問)했다.
내가 어떻게 광주에 대해 축사를 한단 말인가, 감히!
이 자괴감은 지금도 여전하다. 저80년대 내내 내가 전라도와 광주 사람이 아닌 것에 안도하고 살았던 저. 내 존재를 구길 만큼 구겨서 역사에 고백한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편안하지 않았고 행복하지 않았다. 아직도 내 서른아홉 해의 세월을 들추며 거기 공포와 수치심과 자책감의 얼음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 글을 쓰는 건 그 얼음을 녹여야 하기 때문이다. 얼음의 본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다.
여러분, 저에게 주어진 두 번의 축사를 할 기회. 오늘이 두 번째, 마지막입니다.
저를 마음껏 욕하고 비웃고 버려주십시오……..
고맙습니다.
---한국작가회의 회보에 실린
경자샘의 글을 베껴 올린다.
이 마음이 내게도 있기에...
우리는 많이 무서웠고 두려웠고 겁 먹었고 조바심을 내었다.
한편으론 일상에 안주하고 안도하고...
그러나 늘 부끄러웠다. 나는 공부하고 데모도 안했는데
친구들은 감옥에 다녀와 망가져 가는걸 봐야 했으니까...
지금도 빚을 진 느낌으로 미안해 하며 살아간다.
그대들 무두 아프지 말고 지치지 말고 견디고
힘을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