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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칠 것 같습니다.”

한달 전, 내게 날아온 메일의 마지막 줄을 읽고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니까 이건 많이 늦은 답장이다. 제때 제대로 답을 못해 미안하다는 사과문이다. 채 털지 못한 일말의 부채감에 쓰는 글이기도 하다.

메일은 여자친구와 계획에 없는 임신을 하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여자친구는 자연유산 유도약인 ‘미프진’을 구하고 싶어하는데 인터넷으로 홍보하는 업체들을 정말 믿을 수 있는지, 실제로 먹어본 사람을 만나봤는지, 약을 먹으면 임신중절이 제대로 되는지 아니면 수술을 하는 게 나은지 정확한 정보를 알려주면 감사하겠다고 했다.


지난 2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보사연)이 발표한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와 관련해 ‘미프진’ 도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담은 기사를 읽고 보내온 듯했다. 고민은 길었지만 끝내 답을 하지 못했다. 전문 의료인이 아닌데 섣불리 가타부타 말을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컸다. 기사에 담았던 내용 이상으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을 거란 자신도 없었다.

‘미프진’은 세계보건기구(WHO)가 임신 초기 가장 안전한 임신중절 방법으로 권고하는 필수의약품이다. 먹는 약으로 성공률은 90~98퍼센트에 이르며 수술과 마취가 필요없다. 하지만 그조차도 불법인 한국에서 어떻게든 약을 구하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보사연 조사에서 약물 사용자 74명 중 53명이 추가 수술을 받았다고 답했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시장인 이곳에선, 누구도 약의 품질과 효과를 보장하거나 책임지지 않는다. 전문 의료진의 복약 지도도 제공될 리 없어 추가 수술 비율이 높은 것으로 의료계는 보고 있다.

그들은 결국 임신중지를 포기했을까? 아니, 어떻게든 했을 가능성이 높다. 준비되지 않은 임신이 삶을, 특히 여성의 삶을 어떻게 총체적으로 변화시키는지를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다만 더 많은 불안함을 안고, 더 높은 강도의 스트레스를 견디며, 신체적으로 더 위험한 환경에서 했을 것이다. 형법의 낙태죄와 인공임신중절이 오래 병존해온 현실이 말해주는 건, 낙태죄가 태아의 생명권을 보장하기보다 그저 여성의 건강을 위협하는 수단으로만 작동한다는 점이다.

\이기적인가? 이성애-정상가족에서 태어난 아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낙인을 찍어온 사회는 어땠는가. 비혼모가 자신의 경제력만으로 오롯이 아이를 길러내기 어려운 환경에 대해 국가는 어떤 안전망을 마련해놓고 있는가. 임신과 출산을 이유로 여전히 많은 여성이 노동을, 학업을 중단해야 하는 현실은 또 어떤가. 가족계획 명목으로 ‘월경조절술’이란 중절 시술을 오랫동안 제공하고, ‘우생학적 사유’를 임신중절 허용 사유로 법에 명시해 생명을 감별해온 정부의 행태는 어떠한가.

문란한가? 피임 교육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지난달 낙태죄 폐지 촉구 집회에서 발언자로 나선 16살 학생은 “콘돔의 생김새조차 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다. 미성년자들은 임신중절을 위해 배를 발로 차거나 몸을 거꾸로 묶거나 담배와 술을 억지로 하는 일이 벌어진다”고 말했다. 콘돔에 몰래 구멍을 뚫는 이른바 ‘스텔싱’ 경험담이 남성들 사이에 공유되는 현실은 어떤가. 여성이 남성과 성관계를 가질 때조차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놓인다는 사실을 우리는 얼마나 인지하고 있는가.

낙태죄 폐지 요구는 2012년 헌법재판소가 결정문에서 사익으로 간주한 ‘여성의 자기결정권’ 영역에 그치지 않는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도구로 삼아 성별, 혼인 여부, 연령, 성적 지향, 질병, 장애 등을 기준으로 국민을 억압해온 국가에 차별의 정당성을 묻는 행위다. 동시에 ‘국민은 보건에 관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고 헌법에 명시된 건강권을 국가가 어떻게 보장할 것이냐는 문제기도 하다.

그리하여 묻는다. 여성도 국민인가. 국가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미루는 동안, 여성의 몸은 불법과 단속, 처벌의 교차점에서 부유하고 있다. 건강을 볼모로 잡힌 채.

박다해
사회정책팀 기자

doall@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88432.html#csidx126b9a792a66b0dbbdd20bf5d670ca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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