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권 논설위원 |
뉴스타파의 동력은 시청자의 목마름이다.
‘뉴스다운 뉴스’를보고 싶다는 갈망이다.
1976년 6월2일 낮,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의 호텔 주차장에서 굉음이 울렸다. 호텔을 막 떠나는 승용차 아래서 6개의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했다. 운전자인 <애리조나 리퍼블릭>의 탐사 전문기자 돈 볼스는 치명상을 입었고, 열흘 뒤 세상을 떠났다. 숨지기 전 그의 마지막 말은 “결국 마피아에 당했다. 존을 찾아라”였다.
사고 당일 볼스는 여직원에게 제보자와 점심을 한다는 메모를 남기고 사무실을 나갔다. 애리조나주 고위 정치인과 마피아가 연루된 부동산 거래의 정보를 받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약속 장소인 호텔에 제보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그를 기다린 건 다이너마이트 공격이었다. 볼스를 거짓으로 불러낸 존 하비 애덤슨은 얼마 뒤 붙잡혔다.
볼스의 테러 소식이 알려지면서 언론사에 전무후무하게 기록된 실험이 시작됐다. 그가 창립에 참여한 미국탐사보도협회(IRE)를 중심으로 미국 전역에서 20여개 언론사의 기자 38명이 피닉스로 몰려들었다. 대개 자비로 휴가를 냈다. 이들은 ‘애리조나 프로젝트’라는 이름 아래 6개월 동안 볼스가 못다 한 취재에 매달렸다. 마피아와 공무원, 정치인, 사법부 등이 얽힌 애리조나의 부패 구조를 파헤치는 것이 목표였다.
그 결과 23일간 보도될 분량의 기사 40건이 마련됐고, 1977년 3월13일 첫 기사가 <보스턴 글로브> <뉴스데이> 등에 일제히 실렸다. 애리조나 프로젝트는 언론 자유와 언론인의 존재 의미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언론인들의 노력이었다. 동시에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한다는 저널리즘 정신의 숭고한 표현이었다.
그로부터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한국 땅에서 애리조나 프로젝트가 ‘부활’했다. 이근행 전 <문화방송> 피디와 노종면·권석재 전 <와이티엔> 기자 등이 주축이 된 동영상 뉴스 <뉴스타파>가 그것이다. 모두 이명박 정부의 언론장악 기도에 맞서다 방송사에서 해고됐다. 여기에 전국언론노동조합에 파견된 박중석 <한국방송> 기자 등 현직 언론인이 힘을 보탰다. 몇년째 월급을 받지 못한 신세지만 아무런 경제적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오직 저널리즘의 본분인 진실과 정의를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일주일에 한 차례씩, 이제 겨우 두번 방송을 내보냈지만 뉴스타파의 기세는 거세다. 인터넷 유튜브에서 첫번째 방송분의 조회수만 70만건이 넘었다. 이처럼 폭발적인 호응은 두말할 것도 없이 목마름 때문이다. 정권의 홍보방송이 돼 버린 지상파나 ‘조·중·동’ 종편이 제공하지 못하는 ‘뉴스다운 뉴스’를 보고픈 갈망이다.
뉴스타파는 정통 뉴스의 방식으로 지상파와 종편이 외면한 주요 의제들의 이면과 숨겨진 팩트를 파헤친다. 지난 10·26 서울시장 선거의 투표소 변경, 엠비정부 임기 말 14조원에 이르는 무기도입 추진의 내막, 인터넷 투표로 세계 3위의 악덕기업에 오른 삼성, 엠비시·케이비에스·와이티엔 사장들의 전력 등이 그 목록이다. 진실은 잠시는 감출 수 있어도 오래 묻어둘 수는 없다. 파업을 진행중인 엠비시 기자들이 인터넷에 ‘제대로 뉴스데스크’를 올려 성역 없는 뉴스를 내보내는 것도 뉴스타파의 실험과 무관하지 않다.
뉴스타파는 폼 잡고 거들먹거리기에 바쁜 방송사들한테 ‘무서운 놈’이다. 인력과 장비는 비교조차 되지 않지만, 시청자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이슈를 콕콕 집어낸다. 뉴스타파에서 시청자들의 마음을 배워내지 못하면 다윗에게 쓰러진 골리앗 신세가 될 날이 머지않아 올지 모른다. 게다가 뉴스타파는 뉴스의 깊이와 폭을 넓히기 위해 신문 등과의 협력도 모색한다니, 애리조나 프로젝트 정신의 업그레이드가 기대된다. 뉴스타파에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