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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 칼럼] 편지는 사라지고 단체문자만…
한겨레
 
» 김선주 언론인
편지를 받았다. 몇년 전 원주의 토지문화관에서 지낼 때 옆방에 있던 여행작가가 보냈다. 술을 먹다가 목구멍으로 붉은 물이 올라온다고 해서 걱정을 했더니 복분자술을 먹어서일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던 친구인데 나중에 들으니 위에 구멍이 뚫려 피를 많이 흘리고 사경을 헤맸다고 했다. 양산박 두령쯤 되었을 풍모의 그가 단정한 필체로 써내려간 편지를 읽으며 울컥했다. 이메일 주소도 전화번호도 알면서 굳이 편지로 쓰고 있는 책에 대한 고민을 섬세하게 토로한 글이 마음을 울렸다. 봉투에 바뀐 주소인 은평구라는 글씨를 보면서 은평구 전체가 따스하게 다가오는 느낌을 받았다.

 

 

이메일이 대세가 되면서 전통적인 의미의 편지는 사라졌다. 편지를 받아서 기분 나쁜 것은 단체메일이다. 아니 단체문자다. 이번 추석에 몇몇 친구들에게서 단체문자가 왔다. 단체문자는 주로 대리운전이나 수상한 호객행위, 돈 쓰라는 메시지가 주였는데 언제부터인지 주변의 좀 이름있는 친구들이 단체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1년에 서너번은 안부전화도 하고 한두번은 밥을 먹었던 사이인데 갑자기 단체문자의 대상이 되고 나면 그때부터 아 이제 이 사람과의 관계는 끝나가는구나라는 느낌을 받는다. 보내는 사람 입장에선 참 편리한 수단일지 몰라도 받는 사람은 단체로 낚인 기분이다. 젊은 친구들한테 물어보니 자신들도 잘 아는 사람으로부터 단체문자나 영상메시지가 오면 기분이 나쁘다고 했다.

 

 

인터넷 세상의 편리함과 속도감은 아찔할 정도이다. 북한산에 올라가 외국에 있는 친구와 ‘여기는 비봉, 여기는 비봉’ 하면서 영상통화를 하며 참 좋고도 신기한 세상이 되었구나 감탄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런저런 불필요한 편리함을 포기하고 싶어졌다. 인터넷이, 아이폰이, 아이패드가, 스카이프가, 도처의 인증샷이 유리알처럼 개인의 사생활을 비추는 것에도 흥미가 없다. 미국에서 인기 연예인의 위치정보를 알려주는 서비스를 시작한다고 한다. 내가 사는 집도 지도정보를 통해 뜰의 빨랫줄에 널린 속옷까지 다 볼 수 있다니 그런 세상이 정말 좋은 세상일까 도망가고 싶어졌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할 말을 다 하고 모든 정보를 공유하고 쌍방향적인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면 민주적인 세상이 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인터넷이 과연 민주적인 사회를 향해 가고 있는가에 대한 믿음은 사라졌다. 오히려 실체 없는 커다란 힘에 의해 전세계가 조종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이 들게 되었다. 옳은 말이나 틀린 말이 같은 값으로 매겨지고 진품과 가짜가 구별되지 않고 클릭수와 통계에 의해 자본이 집중되거나 떠나게 되고 여론은 왜곡되고 권력은 또 그 위에 군림하게 되는 것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어졌다.

 

 

말과 글은 파편화되어 떠돌아다니며 무서운 생명력으로 여기저기를 파고든다. 개인의 사생활도 인터넷상에서 쓰레기 부스러기처럼 부유하고 있다. 정보는 넘쳐나는데 학문은 없다. 문학엔 서사가 없어지고 비평도 사라졌다. 오직 트렌드와 짜깁기 글만 넘친다.

이 빠른 속도와 파편화된 세상에서 내리고 싶다. 쏟아지는 정보 사이에서 그것을 제어할 수도 장악할 수도 없고 분별해 파악하기도 어렵다. 빛보다 빠르게 전달되는 정보 사이에서 균형과 중심을 잡아야 하는 언론인의 역할에 곤혹스러워질 때가 많다.

 

 

필요 없는 정보가 무슨 소용이며 속도가 빠르면 빨리 죽기밖에 더하겠나 했더니 후배가 속도와 정보로 10년을 100년처럼 살 수 있는데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뛴다. 아무렴 그렇겠지…. 그러나 현기증이 난다. 시간은 많고 할 일은 없는데…. 차근차근 세상에 적응을 포기해야 할 부분과 적응을 적극적으로 해야 할 부분, 그 순위를 찾아야 할 것 같다. 오늘 밤에 여행작가에게 답장부터 길게 쓰는 것으로 속도에서 멀어지는 연습을 해야겠다. 김선주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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