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드라마 보는 할머니를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좋아하는 건 할머니의 특별한
감상능력이다. 어렸을 적 드라마를
보고 나면 할머니는 종종 숭늉으로 입가심하듯 방송 내용과는 사뭇 다른 해석을 내놓곤 했다. 예컨대
문화방송 ‘아들과 딸’이 방영될 당시엔 주인공 최수종과 김희애가 한 이불 덮는
부부(드라마에선 남매)이고, 정혜선은 감때사나운 시어머니(실은 남매의
엄마)로 둔갑되기도 했다. “저 집구석은 시에미 때문에 글러먹었어. 저렇게 메누리를 쥐 잡듯 잡으니, 메누리는 메누리대로 바람나고, 아들은 아들대로 딴살림 차려 겉도는 거 아니겠냐?”
물론 나는 여러 번, 그것도 극중 인물과 탤런트의 실명까지 들먹여가며 뒤틀린 관계들을 바로잡으려 애썼다. 하지만 할머니의 수긍과 이해의 유통기한은 고작 일주일뿐이었다. “종말이년 올케 시집살이 시키는 것 좀 보아라. 옛말에 시다고 시누이랬다.”
일주일 뒤 최수종·김희애 남매는
반목하는 부부로 돌아갔고, 철없는 막내동생 종말이는 못된 시누이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텔레비전이 대중화된 이래 할머니와 드라마의 관계는 그 어떤 친구보다 정답고 살가웠다.
자손들이 제 살길 찾아 집을 나서고, 오랜 지병 끝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재개발로 이웃과 친척들이 도시로 떠나간 사이 할머니 곁을 지킨 건 드라마뿐이었다.
할머니가 아무리 내용을 곡해하더라도 드라마는 속없지만 입심 좋은 이웃 아낙처럼 매일 저녁 할머니를 찾아와 수다를 떨었다. 오랜 세월, 드라마는 자손들 대신 할머니와 옛집을 참 묵묵히도 지켜왔다.
할머니는 요즘도 드라마를 본다.
한국방송 ‘수상한 삼형제’를 보며 ‘소문난 칠공주’의 군인 아버지가 경찰로 직업을 바꾸고 새 아내까지 얻어 사는 줄로 안다. “조강지처 버리고 잘되는 놈 못 봤느니라. 경찰 벌이로 딸 넷에 아들 셋까지 치다꺼리하려면 저 영감 날비 좀 맞겠구먼.”
할머니는 드라마를 보고 나는 그런 할머니를 바라본다. 상대를 완벽히 이해하는 관계란 세상에 없을 것이다. 제멋대로 읽고, 제멋대로 해석한들 어떠한가. 함께 있어 즐거우면 그만이지.
강지영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