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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개별성과 공감 그 기막힌 해석에 그만 목놓아 울다2010.05.21 16:42 1. 개별성이란 무엇인가? 정혜신 선생님이 수많은 상담을 하면서 느낀 인간의 보편적 특징은 사람은 어떤 상황에 처해도 '살 길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란다. 그것을 그분은 '무의식이 가진 본능적 건강성'이라고 명명해 주셨다. 그리고 각 개인이 살 길을 향해 나아가는 무의식적 건강성의 감각을 '사람마다 살아 있는 현재감각'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즉 사람마다 살아있는 그러니까 각자가 살 길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힘, 현재감각이 각 개인이 가진 '개별성'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그 개별성이 존중받고 또 그 개별성을 유지할 수 있는 자신만의 현재감각을 제대로 발휘할 때 가장 행복하다는 이야기셨다.
2. 그런데 독창적인 현재감각을 지닌, 즉 개별성을 가진 사람들이 왜 아프고 힘든 것일까? 그것은 자의로서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본인의 현실감각을 교란시키는 일이 일어나고, 그렇게 되면 살 길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무의식적 건강성 즉 현실감각에 치명적 손상을 입게 되는 것이란다. 즉 자기가 자기의 감각을 믿지 못하는 상태가 왔을 때, 각 개인은 아프고 힘들어 지는 것이라고.
3. 그렇다면 각 개인의 현재 감각에 교란을 주는 주는 원흉은 무엇일까?
1) 집단시각 그 첫번째 원흉은 '집단시각'이라는 것이다. 집단시각을 이해시켜 주시기 위해서 이준익 감독의 '즐거운인생'이라는 영화에서 중고차를 판매하는 인물이 중고차를 매매할 때, 고객이 망설일 때 한방 날리는 한마디 '이거 대학교수님이 탔던 찹니다'란다. 그러면 망설이던 고객이 매매를 결정한다는데. 이때 중고차의 가치와 대학교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데 사람들은 대학교수라는 이미지에 더 높은 선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자기가 하찮은 감투를 가지고 있으면 이런 집단시각으로 인한 상처받을 대상이 된다는 것! 즉 개별적인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제대로된 감투가 없어 저평가되는 경우가 그러할 것이다.
2) 돈 그 두번째 원흉은 '돈'이란다.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이 적게 가진 사람보다 발언권이 더 높은 사회가 되어버렸다는 것! 하여 형제들 간에도 부모님을 모시거나 하는 문제에서의 발언권은 돈이 많고 적음과 무관할진대 어느틈에 서열은 깨어지고 돈이 많은 사람이 더 큰 발언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 하여 상대적으로 돈을 많이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또 상처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4. 집단시각과 돈으로 상처받는 영혼들은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가? 그것은 교란된 현실감각을 지닌 그 개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이란다. 섣부른 충고를 하거나 의견을 말하는 것은 오히려 현실감각을 잃은 개인에게는 치명적 독이 될 수 있다고. 있는 그대로 그 사람을 인정해 주는 것이 바로 '공감'이란다.
5. 어떻게 공감해 주어야 할 것인가? <예1>자살을 하려는 사람에 대해서 생사에 기로에 서있는 사람이 그 답답한 심정을 당신에게 토로해 놓았을 때, 산사람은 살아야지 이런식의 섣부른 충고는 늘어놓지 말아라. 어렵게 자기의 심정을 털어 놓았는데 이런 말을 들은 사람은 당신과 헤어져서 바로 다시 자실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단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 내 마음, 내 아픔을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하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진다는 것. 하여 섣부른 충고를 하기 이전에 그 사람의 아픔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려고 하라는 것. 이미 죽으려고 생각한 사람을 당신이 어떻게 도울 수 있냐는 것이다. 그러니 자살하려는 사람을 섣불리 도우려 하지 말라는 것! 도우려 하지 말고 그냥 들어주라고.
자살을 시도한 사람의 경우에는 되도록 그 경위를 생생하게 설명하도록 한단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죽으려고 했었는지. 목매달려고 했었는지, 약을 먹으려 했었는지, 투신을 하려 했었는지. 목매달려고 했으면 어디서, 어떻게, 시도 했었는지 약은 어떤 약을 모았었는지. 투신하려고 어디로 갔었는지.
난 이 대목에서 참 많이 울었다. 내가 아팠던 그것을 세세하고 세밀하게 가족들에게 말하려고 했을때, 다 듣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냥 묻고 덮으라고. 그냥 묻고 덮을 수 있었으면 입도 떼지 않았을 것인데. 사실 난 아픈 어떤 것을 가족들에게 벌여놓고 그 가족들에게 재상처를 받은 셈이다. 원래 상처가 1차 트라우마인데, 가족들의 반응으로 2차 트라우마에 들어가게 된것이지. 나는 사실 그날의 기억이 너무 선명하게 남아있어 있는 그대로를 설명하고 설명하고 묘사하고 묘사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그냥 그 느낌을 엄마가 언니들이 느껴주고 내편이 되어주기를 기대했지만....., 엄마도 언니들도 모두 그 이야기 듣기를 힘들어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언니 중 한명은 그 사건을 엄마한테 얘기해서 엄마를 두번 죽여야하겠느냐는 죄의식도 심어 주었었다. 초등학교 3학년때 겪은 일! 세월도 한참 지난 그 이야기였지만 너무도 선명하게 내 기억에 남아있는 아픔! 그냥 그때 나로 언니도 엄마도 한번 돌아가 봐달라고. 그래도 엄마는 자기가 이제는 고개를 들을 수 없는 수치스러운 일이라고까지 내게 말했다. 나는 그 일이 있었지만 이렇게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살고 있는데. 엄마는 내편이 되어준게 아니라 그 사건으로 이제 그 친적과 절연해야하는 상황을 나에게 덧씌웠다. 아직도 이것은 풀리지 않은 상처인듯하다.
6. 결론 어떻게 공감을 받고 싶은가? 어떻게 공감을 해주어야 하는가? 이것은 동전의 양면인 것 같다. 공감을 받고 싶을 때에는 그냥 있는 그대로 내 아픔에 상대방이 젖어 또 하나의 내가 되어주기를 원하는 것! 아주 개별적인 터치를 받고 싶은게 공감 받고자 하는 사람의 심리. 그렇다면 반대로 어떻게 공감해 주어야 하는가? 그 사람이 되어 보는 것이다. 경청하고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그 사람의 아픔을 고스란히 느껴보는 것! 그러나 참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제대로 공감 받기도 힘들고. 또 내가 제대로 공감해주기고 힘들고. 그러나 최대한 그러한 성의는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 우아사들의 모임도 조금은 서투를지도 모른다. 일하는 선생님 일하는 우리들. 물론 일은 하지 않더라도 각자 인생의 숙제가 있는 여자들. 그리고 서로 마음은 있으나 정혜신 선생님 말대로 우린 남을 전문적으로 위로해줄 어떤 세련된 기술로 숙달된 사람들도 아니니까.
그러나 그래도 이렇게 이 작은 모임을 하고 나면 왜 내 마음에 깊은 위로가 되는 것일까? 내 상황에 대한 정확한 충고가 주어지지 않았어도 좋다. 내 아픔에 아주 깊은 공감을 해주지 않았어도 좋다. 적어도 미숙하긴 하지만 공통된 하나의 주제는 우아사들이 각자 다 행복해지를 바라는 마음이 서로서로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아주 간소한 삶을 살기를 희망하는 약초샘이 언젠가는 그러한 삶을 살기를 기원해주고, 조금더 발언권을 가지고 남편에게 독립된 인간으로 당당하게 살기를 희망하는 랄라를 안타까워하고 또 때로는 그런 랄라를 답답해하면서 자기 일인듯 화를 내어 주기도 하고(생강이와 보아가 특히 펄쩍 뛰어줘서 사실 내심 기뻤다. 이런 심리를 뭐라 이름 불러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신뢰하는 두사람이 이렇게 화를 내면 그것은 정말 옳은 일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게 해주니까), 지금도 귀여운 모습이지만 조금도 아름다운 여성성으로 은수가 변신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해주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생강이를 독려하고, 보아! 단단해 보였어. 그 뒤엔 근종수술 2번에 내막종 수술 1번이라는 아픔을 딛고 일어선거야. 남편과 자신을 분리하고 아빠와 자신을 분리하고 자신의 여성성을 긍정한 어른 여자로 깨어난 그녀는 내가 닮고 싶은 모습이란 말이지. 이대 나온 그녀! 처음 본 그녀지만 아빠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다면 영혼도 팔겠다는 그녀! 그래 나도 그래 남편을 아버지를 기쁘게 해줄 수 있다면 뭐든 하고 싶었지. 꼭 그 사람한테만 긍정받고 싶은 왜곡된 긍정의 욕구가 그녀에게도 내게도 들어있었던거야.
그런데 그건 아니더라고. 꼭 그렇게 남편이 아버지가 긍정해 주지 않아도 되더라고. 내가 가장 나 다울때, 내가 가장 내 현실감각을 잘 발달시키면서, 나로써 서 있을 때 가장 행복한거야. 괴로운 것은 내가 만족하는 것과 내가 만족시켜 주고 싶은 사람의 욕망 사이의 차이라고나 할까. 어떻게 해도 어쩌면 우리는 타인을 만족시킬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내 개별성을 가장 잘 드러내고, 내 경계를 가장 또렷하게 보여줄 때, 타인도 우리를 이해하는 것이 더 쉽지 않을까? 물론 랄라의 경우엔 생각은 또렷한데 그것을 지켜낼 자아의 힘이 약하다는데 문제이지만. 지금은 약하지만 그것이 영원히 그러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결국 내가 살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의식은 머리로 생각하고 예측하고 판단하여 두려워하지만, 내 무의식에 숨어있는 건강성은 결국 나를 그쪽으로 밀어올려 줄 것이기 때문이다. 타협하고 포기했더라면 오늘 내가 이 자리에 나와있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미 나는 내 힘을 키울 그것들을 찾아 한발한발 나아가고 있다. 물론 그것을 도와주는 서툴지만 마음만은 전문가 못지 않은 우아사들이 있어 든든하고 내 응원군들. 내편 내편. 나는 내 내면의 힘을 키워 어른이 될 것이다. 이제 정말 어른여자가 되고 싶고, 정말로 행복하게 살고 싶으니까.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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윙크하는 이모티콘만 넣으려고 했는데 10자이상 무조건 쓰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