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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소비하는 사회2009.08.10 16:49 선생님, 한겨레 '왜냐면'에 투고한 글이 오늘 실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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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을 통해 시한부의 삶을 치열하게 사는 이들을 보며 사람들은 뜨거운 관심을 나타낸다. 감동이란 말로 그들에게 찬사를 보내고 자신의 나태한 삶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는다. 그렇게 힘든 삶을 이어가던 이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눈물짓고 카타르시스를 느낀 다음 일상으로 돌아가 잊어버린다.
또다른 풍경. 헌법재판소에서 학교 주변 납골당 건축을 불허하는 판결을 내렸다. 아직 우리 사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정서가 더 크기 때문에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다. 국회에서 학교보건법상 금지시설에 납골당까지 포함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일부 학부모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 것도 불사하며 건립을 반대했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좋은 것만 보여줘야 하는데 검은 옷 입고 눈물 흘리는 사람들 보여주고 싶지 않다고 했다. 덧붙여 집값에도 문제가 있다고 했다. 묘했다. 아이들 교육이 문제인가, 부동산 시세가 문제인가.
죽음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광고도 있다. 가스안전공사의 광고. 첫 화면에 유치원 다니는 딸아이가 엄마를 향해 두 손 벌리고 뛰어온다. 엄마는 팔을 활짝 벌리고 아이를 포옹한다. 그 순간 연기처럼 사라지는 아이, 빈손을 쳐다보며 절망하는 엄마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티브이를 보던 한 엄마는 광고를 홀린 듯이 바라보다 사라지는 아이 모습에 가슴이 무너지고, 뒤이은 메시지에 분노를 느낀다. ‘부주의함으로 인해 사랑을 잃지 마세요.’ 사랑하는 딸의 죽음을 겪었던 그 엄마는 속으로 이렇게 외친다. “그래, 나도 충분히 죄책감으로 몸부림친다, 이것들아!” 어떤 이유로든 아이를 잃은 부모는 어린 세대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평생을 간다. 아무리 좋은 목적의 공익 광고라 해도 죽음을 소재로 타인의 가슴을 후벼 팔 권리는 없다. 평소에 죽음을 사유하지 않는 사회가 만들어낸 광고의 수준은 그러하다.
방송에서 다루는 죽음은, 나와는 거리가 먼 불행한 이들의 것, 그래서 가슴 아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의 일이 아니라는 안도감을 확인해 주는 정도에 머물렀다. 한편으로는 납골당 건립은 기분 나쁜 일이고 아이들 교육에 좋지 않고 집값도 떨어뜨리는 원흉이라는 것을 헌법재판소에서 인정해 주었다. 이렇게 죽음에 대한 천박한 인식은 이를 상업적으로 소비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건축가 김진애씨의 책 내용 중 미국에서 아이를 키우던 경험에 관한 얘기가 있다. 주거지 한가운데 있는 공원묘지에서 뛰어놀던 아이가 문득 죽음의 의미를 물어왔다. 엄마 아빠, 그리고 자신도 언젠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이는 한동안 힘들어했지만, 이내 삶의 유한성을 아이 특유의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어느 날 친지의 짓궂은 질문 세례. 너 앞으로 무엇이 되고 싶니, 그다음엔 또 뭐가 되고 싶니 등으로 이어지는 물음에 답하던 아이는 거듭 “그다음에는?” 하는 질문에 자연스레 말했다. “난 죽게 될 거야.”
어려서부터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며 자란 아이는 결코 생명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 학교에서 생사학을 가르쳐야 한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생사학이란 죽음을 배움으로써 역설적으로 삶의 심층적 의미를 알게 하는 학문이다. 이뿐 아니라 동네 곳곳에서 쉽게 공원묘지나 납골당을 드나들 수 있어야 한다. 죽음이란 주제를 먼지 나는 경전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깊이 있게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죽음에 대해 합당한 예를 갖춘 사회는 더는 천박한 상업적 시선으로 이를 보지 않을 것이고, 삶에 대해서도 좀더 고결한 자세를 갖게 할 거라 생각한다.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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