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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없이 산다..(김선주 칼럼 강추!)

2009.04.02 10:05

약초궁주 조회 수:1106 추천:130

언론인 김선주 선배님의 칼럼. 한겨레 펌.

 

 

 

나는 그냥 별일 없이 산다.

유행가 가사처럼. 인디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의 <별일 없이 산다>를 따라 부르며.

이 노래의 가사는 이렇다. …

 

나는 별일 없이 산다, 재미있게 산다. 걱정도 안 하고 고민도 안 하고 산다. 깜짝 놀랐지? 내가 고민하고 걱정하고 살 줄 알았지? 아니거든. 하루하루 재미있게 산다, 약 오르지 … 그런 내용이다. 그런데 하나도 재미있게도 신나게도 들리지 않는다.

 

어쩌면 떠나버린 애인에게 너 때문에 고통받지도 않고, 하루하루 재미있게 근심 걱정 안 하고 산다고, 보란 듯이 안간힘을 써보는 취지의 가사인 것 같다.

 

이 노래의 가사가 마음에 와 닿은 까닭은 나의 요즘 생활신조인 하루하루 재미있게 살자와 딱 들어맞아서다. 연초에, 아무 비리나 잘못이 없는데도, 털어서 먼지 한 톨 안 나왔는데도 임기를 못 채우고 기관장 자리에서 쫓겨난 친구와 밥을 먹다가 재미있게 살자고 약속했다.

 

돈은 없지만 굶어 죽지도 말고, 기가 막혀 죽지도 말고, 분통 터져 죽지도 말고, 어이없어 죽지도 말고, 하루하루 아주 재밌게, 살자는 것이었다. 이 정권이 하는 짓 때문에 속병 들어 죽으면 억울하니까 잘 챙겨 먹고 얄미울 정도로 재미있고 건강하게 살자고 약속했다.

 

날마다 큰 충격을 받으면서도 별일 없이 산다. 명색이 언론인이라면서 현역 기자가, 피디가, 흉악범처럼 긴급체포되어도 주먹을 불끈 쥐고 당장 거리로 뛰어나가 석방하라 석방하라 구호를 외쳐야지 흥분하다가 그냥 주저앉아 별일 없었다는 듯 산다. 성상납, 성접대 등 구역질 나는 사건들이 터져도 이런 너절하고 치사하고 싸구려 같은 인간들 하다가 인터넷에서 리스트를 구해 보고 너냐 너냐 하다가 에잇 더럽다, 김연아나 봐야지 하고 즐거워한다.

 

국가인권위원회 기구를 일사천리로 화끈하게 축소해 버려도 인권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 이 정권의 정체성이란 말이냐 길길이 뛰다가 그냥 야구를 볼까 축구를 볼까 하고 텔레비전을 튼다. 죄목이라곤 전문대 나왔다는 것밖에 없는 미네르바가 아직도 갇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기가 막혀 속이 답답한데도 ‘무릎팍 도사’ 보며 낄낄 웃는다.

 

 자식 나이의 젊은 배우가 성상납과 술시중에 시달리다가, 또 그 사실이 널리 알려질까 봐 자살을 한 지 오래됐는데도 가해자는 없고 수사는 지지부진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는 오리발을 내밀고 유난히 성상납 리스트에 오른 사람들의 인권만은 살뜰히 보살펴주는 수사기관의 행각에 분노하다가 별일 없다는 듯 그냥 지낸다.

 

일제고사가 일제히 실시된다는 말을 듣고 일제 때에 보던 시험이 부활했나 싶어서 이 정권의 과거 사랑이 얼마나 심하면 일제 때로까지 회귀하나 했다. 학교별 줄 세우기, 교사별 줄 세우기가 시작되었구나 싶어 가슴이 철렁하다가도 친구와 맛있는 밥집에서 만날 약속을 한다.

 

롯데에 550미터 높이의 건물을 짓도록 하는 것을 보면서 공군 조종사인 친구 아들 걱정을 하다가, 줄줄이 샅샅이 터져 나오는 박연차 리스트의 끝에 뭐가 나올까 궁금해 죽겠으면서도 내가 이런 꼴 한두 번 보냐 에라 모르겠다 한다.

 

방송을 장악해서 귀를 막고,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고 겁을 줘서 입에 재갈을 물리기 시작하자 입법, 사법, 행정, 언론, 지식인 사회 등 이곳저곳에서 알아서 기는 소리가 크게 나는데도 …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대다수 국민도 하루하루 별일 없이 사는 것 같다.

 

세상에 대한 애정이 있는데, 사회에 대한 기대가 있는데, 우리 자식들이 살아갈 세상인데, 어떻게 이룬 대한민국인데, 젊은이나 늙은이나 고통과 분노, 걱정과 근심 없이, 별일 없다는 듯이 하루하루 재미있게만 살겠다니 … 희망이 보이지 않아서일 거다. 개선의 여지가 없어 보여서다.

 

 

절망 때문일 거다.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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