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위 밥 주고 귀경해서 사람들을 만났다. 한 사람이 말했다. “9개월이 마치 9년 같아요”라고. 그러자 모두 소리 내 웃었다. 필경 공감의 웃음이건만 씁쓸하고 허탈했다. 웃음 뒤끝에 깊은 한숨소리가 배어나왔다. 문득 아인슈타인의 말이 떠올랐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원리를 쉬운 말로 푼 적이 있다. “난로 위에 놓인 손에는 1분이 1시간같이 느껴질 테지만, 좋아하는 그녀와의 1시간은 짧은 1분같이 느껴질 것이다. 그게 곧 상대성 원리다”라고.
“목숨 걸고 경제 살리고, 모든 것을 바로잡겠다”는 이명박 정권의 9개월은 왜 이리도 길게 느껴질까. 입을 다물라는 압력을 느낀 뒤 미네르바라는 논객은 “내 마음속에서 한국을 지우겠다”며 잠수했지만, 그의 인기는 식을 줄 몰라 세상의 상당수 사람들은 여전히 그의 말만 믿는 모양이다. 1997년 외환위기 때도 더 나빠질 게 없었으므로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살아온 나는 미네르바가 제공했다는 수준 높은 경제정보에 관심 없다. 단지 자신의 의지로 마음속에서 대한민국을 오타를 지우듯 지울 능력을 지닌 그 논객이 부러울 따름이다. 불행하게도 나는 아무리 애써도 마음속에서 이 정신없고 슬픈 내 나라를 내 멋대로 지우지 못한다.
내가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일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역대 정권 모두에게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왔다. 김대중 정권 때는 취임하자 그린벨트를 해제하는 바람에 낙망했고, 노무현 정권 때는 그가 메워버린 새만금 때문에 엄청 분노했다. 이명박 정권도 결코 나를 편안하게 하지 않는다. 이 정권의 비극적인 코미디 중 하나는 그가 자신을 ‘환경영웅’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통령은 후진타오가 찾아오자 청계천과 ‘서울의 숲’을 보여주면서 자신이 무슨 외국 잡지가 선정한 환경인상도 받았다고 자랑했다.
땅은 아무런 요구를 한 적이 없건만, 이 나라 국토를 질적으로 ‘업’시키기 위해 대운하를 파겠다고 기염을 토할 때는 먹던 혈압약의 단위를 올려야 했다. 급기야 대통령은 ‘녹색 성장’이라는 도저히 결합될 수 없는 해괴한 말까지도 창안해 내고야 말았다. ‘녹색’과 ‘경제성장’이 어떻게 양립할 수 있단 말인가. 본디 어불성설의 달인이긴 하지만, 나는 그가 최소한 환경 이야기만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미안한 말이지만 그가 돈 이야기를 하면 어울린다. 들을 때 왠지 비참해지긴 하지만 “지금 주식 사면 부자 된다”는 그런 말씀은 차라리 ‘그분’에게 어울린다.
‘녹색’이라는 말이 유독 이 정권 들어서면서 마구잡이로 남용되고 오용되고 있다. 광우병 우려가 불식되지 않은 쇠고기가 시판되고, 아이들이 플라스틱까지 먹고, 관리들이 “농업이라는 말을 아예 하지 말자”고 내뱉는 세상에서 ‘녹색’이라는 형용은 그 자체로 사기다. 지금 우리 주변을 떠도는 ‘녹색’에는 ‘녹색 생각’이 전적으로 빠져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환경운동가’를 자처했던 이도 ‘녹색’을 도구로 삼은 귀족 운동가였으니 할 말이 없기는 하다. 그나저나 운하를 파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사람들이 ‘부국 환경포럼’을 출범시킨다니 환경문제에 대한 몰이해는 가히 극에 달해 있다. 상대성 원리 속에는 시간을 제 속도로 흐르게 할 묘책은 담겨 있지 않을까? 있다면, 알고 싶다.
최성각/작가·풀꽃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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