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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프 행어....(집이란 무엇인가)강추!

2011.09.21 10:29

약초궁주 조회 수:1816 추천:202

배명희 소설가의 짧은 에세이.

 

생명에게 집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파괴할 권리가 있는가

 

안식처라고 생각하는것들이

토목마피아들의 먹잇감에 지나지 않는.

운명이라는걸 요즘 뼈저리게 느끼고 있어서.

배작가의 글을 파일로 소중하게 받아서

올리네.

(같은 안티재건축동지임)

 

 

클리프 행어

                         배명희

 

선생님께서도 이따금 새대가리라는 말을 사용하시지요? 아니라고요. 이런 죄송하군요. 선생님처럼 점잖은 분께서 비속어를 쓸 리 없으시겠지요. 용서하세요. 취하니까 나도 모르게 헛소리가 나오는군요. 많이 마신 것은 아니랍니다. 선생님처럼 유식한 분은 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저희들은 길을 찾는 감각이 탁월하답니다. 전화나 컴퓨터가 없던 먼 옛날에는 대부분의 통신 업무를 맡아 했지요. 머리가 나쁘다면 먼 길을 정확하게 찾아 편지를 전하고 답장을 받아 돌아가는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물론 저는 살인의 지령이나 분홍빛 사연이 담긴 편지 같은 것은 배달해 보지 못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제가 태어나기 훨씬 전, 조상들의 삶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의 궤적이 기록된 책은 많이 있습니다. 그 중 한 권만 읽는다면……. 선생님께서 얼마나 바쁜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따위 하찮은 것, 이라는 말씀은 지나치다고 생각되네요. 불평이라니요. 이야기해드리지요. 하찮은 사실이 기록 된 책을 찾는 수고를 덜도록 말입니다.

 

 

우리는 아침 7시. 오전 11시 오후 4시, 하루에 세 번 시장에 갔습니다. 지방에서 쌀과 보리가 올라오는 시간입니다. 먹이가 부족하면 곡물가게 안으로 진격해 쌀부대를 쪼기는 하지만, 하루도 거르거나 시간이 틀리는 일은 없었습니다. 어쩌다 잡혀 구워 먹히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런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지요. 중금속에 몸이 오염된 덕이지요. 7년이던 수명이 2-3년으로 줄었답니다. 도시의 삶이란 참으로 힘겹지요.

 

 

얼마 전까지 제게도 번듯한 집이 있었답니다. 재벌 회사의 빌딩 앞을 지나는 고가도로 아래 였지요. 밥을 먹고 오니 집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겁니다. 집이 있던 자리에는 휘어지고 구부러진 철근과 깨진 시멘트덩이와 자욱한 먼지만 가득했습니다. 저와 동료들은 굴삭기의 굉음 속에서 우왕좌왕 날며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몇 번이나 공중을 돌며 집을 찾아보았지만 소용없었습니다. 흙먼지 뒤집어쓴 바람만 사납게 불었습니다.

 

 

우리는 각기 살 곳을 찾아 흩어졌습니다. 가족과 친구 사랑하는 짝과도 헤어졌어요. 제 삶은 그곳에서 멈춰버린 것 같았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경험이 없으시겠지요? 인간에게는 불가능이란 없는 것 같습니다. 허공을 막아 빌딩을 만들고 구부러진 강을 반듯하게 펴고 바다를 메워 공장을 짓고. 그 막강한 힘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우리는 하루치 먹이만 있으면 만족하지요. 선생님께서는 정치인들이 존경한다는 서민이시겠지요? 환생을 믿는다면 지금 당장 죽어 서민으로 태어나고 싶습니다만, 실은 전생이나 내세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환생을 믿으시는지요? 지금, 새대가리라 하셨습니까? 조금 불쾌하군요.

 

 

어디까지 말씀드렸나요? 내 이웃들, 그렇군요. 대부분이 떠났지만 일부는 남았지요. 늙거나 병들어 멀리 날지 못하는 동료들이 주로 남았답니다. 우리는 영역성이 강해 다른 동족들이 사는 곳에는 들어가지 않아요. 그래서 살던 곳을 떠나면 힘이 들지요.

 

 

저는 시청 옥상으로 갔습니다. 그곳에는 1985년부터 2000년까지 무려 90차례나 하늘을 수놓은 동족들의 마을입니다. 대통령배 고교야구 개막식, 한 민족 체전은 물론 통일을 원하는 인간들의 염원을 담은 평화의 사도가 되어 북쪽으로 간 무리도 있습니다.

 

 그들이 사는 곳을 ‘타워펠리스’ 라고 합니다. 타워펠리스의 녀석들은 건강미 넘치는 몸과 윤기가 흐르는 깃털을 지녔고, 삶의 긴장이나 고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우아한 놈들입니다. 젊고 튼튼한 날개를 믿고 저는 타워펠리스에 갔습니다만 패기와 용기만으로 유토피아에 입성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루에 두 번 인간이 공급해주는 밥을 먹을 스펙을 갖추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타워펠리스는 그들만의 천국이었습니다.

 

제가 무능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누굴 원망하겠습니까? 제 탓인걸요. 술을 마시는 시간에 비행 연습이나 하라고요? 그럴 생각이랍니다. 꿈이 생겼거든요. 꿈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씀드리지요. 꿈이란 놈은 제가 거나하게 취했을 때 찰싹 달라붙거든요. 지금은 골목 모퉁이에서 서성대고 있어요.

 

 

타워펠리스에서 쫓겨난 저는 공원으로 갔지요. 잠실과 뚝섬, 여의도에는 집을 철거당한 우리를 위해 인간들이 만들어준 집이 있습니다. 정말이지 저는 타인의 불행을 외면하지 않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인간을 사랑합니다. 저는 88 서울 올림픽 때 방사된 3천 마리의 후손입니다. 지금은 천적인 매도 없고, 우리를 잡아먹는 인간도 없지요. 베이비 붐 이전에는 저희도 럭셔리하게 살았답니다. 무엇이든 넘치게 되면 문제가 생기나 봅니다. 제가 주제넘은 말을 지껄였군요.

 

공원에는 놀러 온 사람들이 먹이를 던져 주곤 합니다. 원주민 동족들이 텃세를 부리지만 버틸 수 있었답니다. 젊은 데다 눈치껏 굴었으니까요. 힘없고 약한 동료들은 다른 곳으로 떠났습니다. 공원에서는 굶어죽을 염려는 없다고 말리니 굶어도 당당하게 살겠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굶으면서 어떻게 당당해지겠다는 것인지요. 아직도 그 말을 이해할 수 없답니다. 꿈이 뭔지를 말해주면 선생님께서 궁금증을 풀어 주시겠다고요.

 

 

제가 공원을 떠난 것은 집 때문이었습니다. 집은 32개의 구멍이 있는 아파트형이었습니다. 다른 녀석들과 뒤섞여 부딪치는 바람에 통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집은 겉모양만 그럴듯했습니다. 출퇴근 시간의 만원 지하철 비슷하냐고요? 지하철을 타보지 못해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지만 존경의 대상인 서민들이 타는 지하철과 감히 비교하다니요. 선생님께서 새대가리가 된 게 아닌가 걱정이 되는군요.

 

 

불면의 밤이 지속되자 미칠 것 같았습니다. 성추행을 당한 날 새벽, 그곳을 나왔습니다. 제게 야릇한 날갯짓을 하던 부녀회장이 저의 은밀한 부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수치스럽습니다. 친구와 함께 떠났더라면 몹쓸 짓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요. 제가 새대가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선생님처럼 교양이 있으신 분과 대화를 나누니 깨달음을 얻게 되는군요.

 

저는 아파트와 단독주택이 모여 있는 동네로 옮겼습니다. 공원이나 시장이 멀어 먹이를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늙고 병들어 비실대는 동족뿐이었습니다. 비열하고 힘센 녀석이 없는 대신 종일 땅을 쪼아도 배가 고팠습니다. 빵부스러기를 주워 먹다가 차에 치여 죽는 놈, 줄에 걸려 발목이 사라진 녀석들, 동료들처럼 저도 조금씩 쇠약해지고 있습니다.

 

 

몇 녀석이 쓰레기장이 있는 시장 근처로 이사를 가자고 저를 꼬드깁니다. 그곳에서는 쓰레기봉투를 파먹고 살지요. 삶의 막장입니다. 간밤에 한강에서 만 개의 알이 사라지고, 잠자던 동족들이 독극물에 몰살당했다고 동료가 알려주더군요. 우리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현수막이 공원과 거리에 나붙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배설물이 자동차를 변색시키고, 문화재를 파괴하고 인간에게 병기는 것이 문제라고 하는군요. 쓰레기장이 아니면 앞으로 먹이를 구하기가 어려워진다고 합니다.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말씀 드렸던가요? 저의 동족은 원래 지중해의 암벽지대에 살았다는 것을요. 그리스의 깎아지른 듯 한 절벽에 살던 조상들이 이 도시로 온 것은 20세기 후입니다. 우리에게는 클리프 행어의 피가 흐르고 있지요. 그래서 도심의 고가다리나 다리 밑, 고층 아파트의 베란다에 주로 둥지를 틀지요. 꿈이 뭐냐고 물으셨지요? 술을 조금만 주신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선생님의 손이 떨리시네요. 하긴 날씨가 보통 추워야지요. 술이 들어가면 한결 견디기가 수월하지요. 골목 모퉁이에서 서성이던 꿈이 다가오네요.

 

 

제 꿈은 고향에서, 초록빛 바다가 보이는 절벽에 둥지를 틀고, 금빛 햇살 가득한 창공을 날아보는 거랍니다. 선생님은 그리스로 가는 길을 알고 계시겠지요. 제게 가르쳐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제가 오늘 밤 추위를 막을 수 있는 신문지와 두터운 골판지가 있는 곳으로 선생님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벌써 잠이 오다니요. 저는 겨우 서 너 방울을 핥았을 뿐인데요. 부탁입니다. 잠들기 전에 그 술병을 기울여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오늘 밤 행복한 꿈이 제게 올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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