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은 한 시대를 노래로 기억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똑같은 시대를 지내온 어떤 사람은 그 시대를 노래로만 기억할 수 없다. 노래 밖의 세상을 기억하는 것이 끔찍해서다. 지난 추석 무렵 텔레비전의 예능프로그램이 1960년대 음악감상실 ‘세시봉’을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갔는데 인기가 많았는지 해가 바뀌어 설날까지 계속되었다. 후배가 “세시봉 이야기 재미있어요. 선배도 세시봉 세대 아니에요. 한번 보세요” 했다.
맞다. 나는 세시봉 세대다. 그 음악프로그램에 나온 사람들 모두 또래의 음악인들이고 60년대에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 많은 젊은이들처럼 세시봉과 바로 건너편에 있던 클래식 음악실 르네상스를 왔다갔다 했다. 그러나 그들의 추억담을 들으며 감동과 재미를 못 느꼈다. 아물었던 상처가 덧나고 피가 흐르는 듯했다.
70년대는 우리나라 노래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기였다. 수많은 금지곡들이 양산되었고 음악인들이 음악활동을 접어야 했다. ‘행복의 나라로 가자’고 하면 여기가 행복하지 않냐고 했고, ‘그건 너’라고 하면 유신 때문이냐고 했다. 여가수의 손짓은 북한과의 교신이라고, 돌아오라고 하면 누구를 돌아오라고 하냐고, 왜 붉냐고, 왜 불이 꺼져 있냐고, 왜 연못이 작냐고 했다. 70년대가 한국 노래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것은 70년대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살벌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 정점에 군사쿠데타로 집권하여 종신집권을 꿈꾸던 박정희가 있다.
두 번의 대통령도 모자라 3선개헌으로 대통령이 됐다. 다시 유신헌법을 선포해 체육관에서 수천명의 거수기를 모아놓고 100%의 지지율로 다시 두 번의 대통령이 되었다. 북한의 김일성처럼 절대권력을 도모했던 그는 궁정동에서 김재규의 총을 맞고서야 20년 장기집권을 끝낼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30년, 40년이 되었을 수도 있고, 북한처럼 세습할 수도 있었고, 아마도 우리는 벌써 오래전에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가졌을 수도 있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모든 것이 국민투표라는 합법 아래 진행되었다. 그 70년대에 전태일은 분신했고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은 사형 확정 열여섯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200명이 넘는 기자들이 내쫓긴 언론인 학살이 있었고 김대중 납치사건이 있었다. 유신을 반대하면 언제 어디서든지 누구나 잡아넣을 수 있었고, 그 사실을 보도하는 언론사는 폐간시킨다는 긴급조치가 있었고, 언론사는 알아서 죽었고, 언론인은 알아서 기었다. 금지곡의 배경엔 그런 시대가 있었다.
암울한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미래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고, ‘큰바위얼굴’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것은 큰바위얼굴을 바라보며 살다가 스스로 큰바위얼굴이 될 누군가를 위해서다. 미래를 위해서다. 노래에 얽힌 추억담에서 가슴에 통증을 느끼는 것은 70년대가 현재진행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나이 들어 과거 이야기만 하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온 길 돌아보지 않고 갈 길만 생각하자고 다짐했지만 그 갈 길 앞에 온 길이 다시 버티고 서 있다는 느낌이 든다. 박근혜 대세론과 국민투표와 70년대 금지곡이 오버랩된 탓이다. 박근혜는 인혁당 사건이 수십년 지나 무죄가 되자 ‘거짓이고 모함’이라고 말한 바 있다. 미국 남부의 명문 사립대 에머리대학은 어제 노예제도와 관련된 대학의 설립 과정에 대해 사과하고, ‘잘못된 역사를 인정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70년대에 내 젊음을 두고 왔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 노래 때문이다. 세시봉 이야기 때문이다. 시퍼렇게 기억이 살아남아 70년대처럼 가슴을 옥죄고 살벌했던 시절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세시봉에 감동을 느꼈던 젊은 세대들에게 말하고 싶다. 70년대를 기억하라고. 그 살벌했던 유신시대를, 세시봉 바깥세상의 노래 이야기를, 그때가 어떤 세상이었는지를
~~~그때가 어떤 세상이었는지를
역사교과서는 안갈쳐준다.
지금이 어떤 세상이었는지를
우리는 더 생각해야하고 고민해야하지 않을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