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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년의 일기장, 그날 나는 내가 싫었다.

2009.01.05 11:59

약초궁주 조회 수:2240 추천:244

저는 정말 노구를 이끌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농사를 지었습니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밭에 나가서 일하다가 호미가 헛돌 때 일어나곤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추수를 하려니 이게 사람이 먹기엔 뭔가 좋지 않은 점이 있어서 팍 쏟아버리고 다시 짓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며칠 전에 모두 끝냈습니다. 긴장이 풀려서 폭삭 삭아내려앉을까봐 신경 쓰고 있습니다. 아직 일은 좀 남았습니다. 뉘도 골라내야 하고 쭉정이도 골라내야 합니다. 포장지는 어떤 것으로 할까, 봐야 합니다.



그럼 그 동안 못 한 일기를 쓰겠습니다.

그날 나는 내가 싫었다.  

제가 짓는 농사일은 참 몸이 고단합니다. 한 자리에 앉아서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일을 한 나절 하고 반드시 몸을 굴려야 합니다. 이건 저의 방식입니다. 그날도 그래서 어정어정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어디쯤 가다보니 앞에서 도무지 속도를 내지 못하는 '눔'이 보이더라고요.

 

작대기를 짚고 배낭은 무겁게 지고 아직 그다지 춥지 않은데 유명 등산복 딱지가 콱 박힌 점퍼를 입었는데 아, 어찌나 맘이 짼한지. 엇그제 짤렸구나. 명퇴금이나 받았나. 새끼들은 아직 학교에 다닐 것 같은데....이게 저의 직업병입니다. 무엇을 보건 그 자리에서 쌀 한가마니 너끈히 지어냅니다. 등산이 무엇인지 안다면 저런 차림을 하지 않을 건데 얼마나 저자거리에서 혼이 났으면 저리 무장을 했을까, 아 불쌍해라 아들이여! 


상상은 거기에 머물지 않고 집안에 있을 실의에 찬 아내와 자식들까지 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여운 눔' 은 오는 사람들에게 계속 밀리더군요. 저는 차마 앞설 수 없어서 기는 걸음으로 따라 갔습니다. 자주 서서 수건으로 이마와 목의 땀을 닦아내는 안쓰러운 모습을 지켜보면서요. 
'아저씨. 점퍼는 벗으세요.'
이렇게 말하고 싶어 죽겠는데 참았어요.
'아저씨. 여인숙가요'
이렇게 들을까봐요. 지가 A형입니다. 


할 수 없어서 제가 앞장섰습니다. 그런데 이게 도리가 아니지. 저 참혹한 심정일 사람을 뒤에 두고 마구 가는 건 사람으로 할 일이 아니지. 인생을 오래살아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은 할머니로서의 태도가 아니지. 저는 깊이 자책하고 마침내 기다렸습니다. 그가 다가오자 말했어요.
'아저씨. 점퍼 벗으세요. 벗기 싫으면 지퍼를 열으세요. 등산 처음이시지요?'
 그는 지쳤는지 대답도 못하고 제가 말하는 데로 하더라고요. 두어 달만에 올라오니 힘들다면서요. 저는 한참 올라가다가 기다려주곤 했어요. 

 

실직으로 인한 정신적 열패감이며 가족을 차마 마주 보기 힘들 그에게 인간적 친절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가 나름대로 나의 친절을 저울질 했는지 다소 경계하던 것을 푼 듯한 표정으로 웃으며 자신을 기다렸느냐, 그러다라고요. 그러더니 내가 장갑을 끼지 않은 것을 보고 자기 것을 끼래요. 싫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배낭을 내려서 여자용 장갑이 있다며 꺼내주더라고요. 순간 약간 느낌이 이상했어요. 거절하고 싶었지만 꼈어요.

 

 그는 칼바위 능선으로 해서 대동문까지 가서 진달래 능선으로 내려간대요.손금보듯 훤한 곳이지요. 마침내 내가 좋아하는 칼바위로 올라가는 지점에서 그가 내게 우회하자고 그러더라고요. 할 수 없이 그렇게 하자고 했어요. 나는 대동문까지는 가지 않을 생각이었고요. (왜냐면 거긴 싫은 이유가 있어요.) 우회로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우회로부턴 그가 나를 앞지르더라고요.

 

그러더니 쉬자고 해요. 그가 앉아서 사과를 꺼내더라고요. 나는 마주보기 싫어서 옆으로 앉았더니
'은행나무는 암수가 마주봐야 열매를 맺는다고 하는데 우리도 마주 봅시다'
 그가 그러는 겁니다. 딱 싫어지기 시작했어요. 참았습니다. 마주 앉았어요.

 

약초궁주가 이 지점에서 내 옹졸을 욕할까 걱정하면서요. 그는 내게 대해 묻고 저는 어떤 직장을 다니는데 야근하고 낮에 잠 좀 자다가 등산을 왔다고, 지금 입고 있는 점퍼는 미국에 가서 샀다고, 수유 시장에 가서 막걸리 한 잔 하고 가라...등 등. 

 


참고 또 걸었어요. 갈림길도 없으니까요. 비탈길을 올라가게 됐어요. 그는 여전히 너무 잘 걷더라고요. 나보다 앞서 가던 그가 남자 허벅지만한 소나무가지가 앉기 좋게 늘어져 있는데 거기 달랑 올라앉아서 날 기다리다가 자기 옆에 앉으래요. 저는  그 남자에게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주고 그냥 혼자 올라갔습니다.

 

 대동문과 반대인 칼바위로 기어올라갔지요. 기분이 내내 찜찜하더라고요. 왜 나는 연민을 가지는가, 등등 해서. 왜 잘난 남자, 그러니까 나에게 막걸리라도 사주려 하는 남자에게는 질겁하는가, 왜 내가 무언가를 해줘야 하는 남자만 좋아하는가, 등등 많은 반성을 하면서 산을 내려왔습니다. 집에 와서도 내내 찜찜했습니다. 지난 수십년 간의 내 남성관계를 돌아보며 스스로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세상엔 이런 여자도 있고 나와 같은 남자도 있겠지, 해도.... 내가 싫더라고요.


나도 좀 '공주...'라는 거 해볼 수 없나?
사실 전 공주...같은 대접이며 삶이 싫어요.
일꾼이 좋아요. 일하는 여성. 자기 밥 자기가 지어서 먹는 일..... 그런 삶.
꾸뻑.     

 

 

~~에이 씨. 촌년 온냐를 콱 쥐어 박고 싶다  

말로만 외롭다 어쩐다 해쌓고는 막상 닥치면

혼자 엉뚱소설이나 쓰고.

지 시력나빠 멀쩡한 사람은 구박하고 내친다.  

히스클리프같은 나쁜남자, 불쌍한 남자에만 필꽃혀

물 엔간히 먹어도 그게 사랑이고 헌신인줄 아는 촌년

이번 생에서 얻은 중병이다. 불치병인듯 싶다.

 

차라리 내가 북한산 칼바위 길목에서 그를 만나

사과도 깍아주는대로 낼름 받아먹고

수유리에서 막걸리도 나눌걸. ...낄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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