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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생명의 섬을 걷다(한겨레21)2008.10.21 15:17 강화도, 생명의 섬을 걷다 언니들과 함께한 ‘게으른’ 산책… 개발 열풍에 뒤척이는 ‘시시한 풍경’의 애틋함이여
▣ 강화=글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강화도는 에로틱하다. 결코 나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곳곳에서 방문객을 조바심나게 만든다. 저 산자락을 돌아볼 수 있다면, 저 너머에 들어가볼 수 있다면…. 교교함은 섬 북단 철책이 둘러쳐진 군사시설 보호구역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이곳을 살짝이라도 들춰볼 기회를 얻은 이들은 강화도와 혼연한 한 몸이 될 날을 꿈꾼다.
한국적 원형질을 그대로 지닌 곳
강화도는 여성적이다. 쏟아지는 햇볕과 날 서지 않은 바람이 섬 전체를 부드럽게 감싼다. 들녘은 만추에 빛난다. 아무도 배제하거나 밀어내지 않지만, 누구도 쉽게 파악하거나 귀속할 수 없다. 국내 4대 강 가운데 유일하게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기수역이 트여 있는 한강 하구는 뭇 생명들의 젖줄이다. 섬 북단을 휘돌아 내리며 펄에 몸을 댄 것들을 먹이고 키운다. 강화도는 역설적이다. 군사적 대치가 섬의 평화를 지켰다. 생태와 자연과 토착민의 살림은 쇳스러운 무기들이 결집된 휴전선 끝자락에서 오히려 편안했다. 강화도의 길은 그래서 밟는 길이 아니라 스며드는 길이다. 서울의 지척인데도 수도권에서 시작해 전국을 뒤흔든 개발 광풍은 아직 48번 국도를 휩쓸지는 않았다. “자 이번에는 랩송을 시작합니다.” 11월3일 오전 11시, 봉천산 꼭대기. 일군의 여성들이 흔들흔들 몸을 놀린다. 산불 감시초소 옆에 써붙여진 시구가 랩 버전으로 바뀐다. “청산은 날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요~요.” 북쪽의 송악산, 광덕산, 물가 마을들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북녘 땅이 훤히 내다뵈는 봉우리에서 춤을 추는 이들은 이날 아침 강화군 하점면사무소 앞마당에 모인 ‘강화 번개’ 참석자들이다. 수년째 강화도 구석구석을 ‘걸어온’ 이유명호 한의사를 중심으로, 오한숙희 여성학자, 서명숙 (사)제주올레 대표, 김선주 전 <한겨레> 논설주간, 정정엽 화가 등이 눈에 띈다.
산 아래에서 봉우리까지는 불과 1.2km이다. 운동화 신고 편안하게 산보 삼아 들기에 맞춤하다. 틈나는 대로 쉬고 놀며 올라도 40분이면 족하다. 15분 남짓 올랐을까. 시야가 탁 트이며 섬과 일대가 한 품에 안긴다. 단정하게 구획된 들녘에는 수로가 흐르고, 석모도·교동도 너머 서쪽 바다까지 너르게 펼쳐진다. 늦가을 햇살에 천지가 반짝인다. 봉천대는 예부터 서민들이 천제를 올리던 곳이다. 관이 마니산에서 천제를 지냈다면 민은 봉천산에서 하늘을 모셨다. 제주도에서 걷는 길을 만들고 있는 서명숙 대표는 “제주의 풍광이 드라마틱하고 이국적이라면, 강화도는 유년의 향수를 떠올리게 하는 한국적인 것들의 원형질을 그대로 지닌 곳”이라며 “풍경에도 음악과 같은 장르가 있다면 강화도는 편안함과 아늑함으로 분류될 것”이라고 말했다. 평야, 갯벌, 수로 같은 ‘시시한 풍경’은 현대문명이 굉음을 내며 작살낸 것들이기에 더 애틋하다.
수로를 따라 걸어 바다에 닿다
김포에서 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오른쪽으로 빠져 달리다 보면 어느 틈엔가 내비게이션이 작동을 멈춘다. 지도에도 길이 없다. 철조망이 삼엄하게 쳐져 있다. 해안에서 꽤 떨어진 봉천산 역시 북쪽 봉우리는 일반인 출입 금지이다. 방문객이 오를 수 있는 곳은 남쪽 봉우리의 서남쪽 능선뿐이다. 고려 고종이 학생들을 모아 공부시켰다는 월곶리 연미정도 군사시설 보호구역에 속해 있다. 연미정 절벽 아래로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해 한 줄기는 서해로, 또 한 줄기는 강화해협(염화강)으로 흐른다. 그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여졌지만, 군부대 허가 없이는 눈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북쪽으로 적북돈대, 의두돈대를 거쳐 불장돈대를 꼭짓점으로 돌아 서쪽 구등곶돈대, 인화돈대를 지나 창후리 무태돈대에 이르기까지 철조망이 계속된다. 길은 강에서 멀었다 가까웠다 한다. 허가 없이는 강과 땅이 만나는 경계에 발을 들일 수 없다. 흐르는 물길이 휴전선이다.
강화도 최북단 마을 철산리에서 북쪽 개풍군까지는 지척이다. 가까운 곳은 물폭이 불과 1.7km이다. 두 해 전 빈 페트병 다섯 개를 묶고 헤엄쳐 넘어온 용감무쌍한 ‘귀순 동포’도 있었다. 물길을 잘 만났기에 무사했지, 잘못 탔다면 강화도를 코앞에 두고 백령도쯤 떠내려갔을 것이다. 언니들과 나들이에 나서면 두 가지가 좋다. 첫째, 허덕대며 쫓지 않아도 된다. ‘간세다리’(게으름뱅이를 뜻하는 제주도 말)가 될 수 있다. 앞사람 발자국만 따라 ‘고지를 정복’하는 식의 등산이 아니라 틈나는 대로 쉬고 노는 입산이다. 봉천산은 능선이 완만해, 아이들과 노인들도 쉬엄쉬엄 오를 수 있으니, 정복욕 강한 이들은 성에 차지 않을 수 있다. 두 번째, 입만 가도 된다. 찐 고구마, 김밥, 떡, 오이, 과일, 각종 차… 이날 등장한 먹을거리만도 셀 수가 없다. 야채수프까지 보온병에 한가득 담겨왔다. 봉천대에서 몸을 풀고 내려오는 길, 석탑을 만난다. 봉은사지 5층 석탑이다. 봉은사는 개성에 있던 고려의 국가 사찰로 고종 19년(1232) 수도를 강화로 옮길 때 함께 옮겨왔다. 강화도는 39년간 고려의 왕도였다. 외침과 부침의 역사가 곳곳에 스며 있다. 석탑 주변은 수십 명이 앉아 수건돌리기를 해도 좋을 만큼 그늘이 넉넉하다. 풀밭도 폭신하다. 두어 시간 등산을 마치고 돌아갈 사람은 돌아가고, 내처 바다까지 걸을 이들은 이곳에서 신발끈을 다시 묶는다. 하점초등학교 앞에서 길을 건너 들판으로 내리면, 그때부터 ‘걸어서 바다까지’이다. 수로를 따라 걷고 또 걸으면 바다에 닿는다. 강화도를 걷는 묘미는 섬 북단 군사시설 보호구역의 해안 철책길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성묘 등을 이유로 외지인이 오기는 하지만 이곳을 드나들 수 있는 이들은 현지인들뿐이다. 외지인은 신분증을 맡기고 허가를 받아야 한다. 앞서 10월7일 현지인과 함께 찾은 강화 북단은 천혜의 ‘생태적 요충지’였다. 부지런한 개리 몇 마리가 벌써 겨울을 나러 왔다. 먹이를 잔뜩 잡아먹었는지, 뒤뚱대며 기분 좋게 ‘과악, 과악’ 놀고 있었다. 인적이 닿지 않은 광활한 습지가 모두 이들의 놀이터다.
강화 북단은 남북의 화해 국면에서도 여전히 긴장이 서려 있다. 오랜 대치에 따른 긴장이 아니다. 지금의 것은 개발과 보존이 맞선 팽팽한 긴장이다. 남북 정상이 한강 하구 공동 이용 등을 담은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에 합의하기 전부터 온갖 장밋빛 개발 구상들이 쏟아져나왔다. 10·4 공동선언은 이들 구상에 날개를 단 셈이 됐다.
계획이 현실 된다면 ‘한심해’ ‘열바다’
한 대형 건설회사는 영종도부터 강화도를 거쳐 개성까지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59.9km의 고속도로를 놓을 계획을 짜고 있다. 인천시는 강화 본섬과 석모도·교동도를 잇는 제방을 쌓고 조력발전시설을 두겠다고 나섰고, 환경부는 영종도 북단에서 강화 남단 일대를 매립해 해상공원을 만들기 위한 사전 조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력 대선 주자는 이곳에 아예 여의도 면적의 10배에 달하는 인공섬을 짓겠다고도 공약했다.
이곳을 찾기 바로 전날, 한강 하구에 쌓인 모래라면 앞으로 20년은 채취해도 넉넉하다는 뉴스가 각종 언론에 쏟아져나왔다. 동행한 고은광순 한의사는 개풍과 강화도를 잇는 연륙교 자리로 꼽힌 철산리의 한 지점에서 “지금 나오는 계획이 현실이 된다면 저 바다는 ‘한심해(海)’, 혹은 ‘열바다’로 길이길이 불릴 것”이라고 말했다. 뭇 생명들이 다 죽어나갈지 모른다는 우려이다. 실제 김포 쪽 한강 하구가 개발되면서 머나먼 강화 남단 동막의 개펄까지 점점 딱딱해지는 것으로 관찰됐다. 물 흐름이 급격히 바뀌어 먼 바다로 떠나가야 할 퇴적물들이 쌓인 결과로 추정된다. 조류 전문가들은 강화도 개발로 새들이 번식처를 위협받으면 일부 종은 급격히 멸종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사람들이 즐겨찾는 강화도는 마니산, 전등사, 동막 해변 등이 위치한 섬의 남단이다. 섬의 생태도 주로 이곳을 중심으로 한 얘기다. 섬 북단은 체계적으로 조사를 한 적조차 없다. 날아다니는 새들의 개체 수 정도만 파악됐다. “거기 들어가면 지뢰에 다 죽을 텐데 누가 함부로 들어가느냐”는 얘기가 떠돌기도 했다.
환경·생태주의자들은 정부와 지자체가 각종 개발계획을 세우기 이전에 최소한 이곳의 생태 환경이 어떤지, 어떤 생물종이 서식하는지 확인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항변하고, 정부와 지자체와 개발업자들은 남북이 공생할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환경·생태적 가치를 유보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고속도로를 놓겠다는 건설업체 담당자는 “사과에 머리카락 굵기의 바늘을 찌르는 정도일 뿐”이라고 도로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했다. ‘개발’과 ‘보전’이 평화롭게 공존하기란 남북 통일보다 요원한 것일까.
강화도가 그저 좋아 12년 전 가족과 함께 들어왔다는 김순래(50) 강화고 교사는 “남북의 화해와 번영을 위해 물길은 풀되, 막개발은 온당치 않다”고 말했다. 가령 교동도는 북쪽 바다가 군사경계지역이라, 강화 본섬을 오갈 때 물때를 잘못 맞추면 15분이면 되는 뱃길이 남쪽으로 빙 돌아 한 시간 넘게 걸린다. 김 교사는 “풀어야 할 것은 이런 소모적인 일들”이라며 “개발 소식에 들썩이는 사람들은 땅을 소유한 이들이고, 절반 이상은 외지인들”이라고 귀띔했다.
철조망을 걷지 않는 게 좋은 이유
강화도를 아끼는 이들은 그런 탓에 철조망을 걷지 않는 게 좋다고 입을 모은다. 강화도의 자연을 지켜준 ‘생태 보호선’이었기 때문이다. 철조망을 그대로 두고 그 옆으로 평화 순례길을 만들자는 얘기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유명호 한의사는 “분단의 역사, 개발과 생태의 긴장, 미래의 평화까지 고루 체험할 학습장”으로서의 ‘걷는 길’을 제안한다. 돈을 아무리 들여도 이만한 천연 학습장은 절대 만들기 어렵다는 새로운 ‘개발’ 논리이기도 하다.
봉천산에 안겼다가 걸어서 바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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