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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길에 내맘대로 별을 주다(시사IN)

2008.10.16 11:29

yakchobat 조회 수:2358 추천:180





 

제주 ‘올레’ 길에 내 맘대로 별을 주다



약이 올랐다. 주위 친구들은 진즉부터 밥벌이를 때려 치고 잘들 놀고 있었다. 믿었던 후배 서명숙마저도 지독한 사랑에 빠졌던 회사에 ‘사장이 맘에 안든다’고 그만 두었다. 팔자도 좋지. 산천경개 유람을 다니더니 다시 직장을 잡았다. 쌓아 논 재물도 없는 것이 주제 파악하나보다도 잠깐. 이번에는 ’뉴스가 싫어요‘ 라며 뛰쳐나왔다. 얼마 뒤 그는 산타아고 순례길 840킬로를 걷고 안나푸르나 ABC를 오르더니 10킬로 마라톤을 완주했다. 몇 년전 만해도 걷는 걸 질색하며 코앞도 택시를 타던 인간이 아니던가. 지금은 환골탈퇴, 천천히 걷고 조금 먹으면서 인생 최고의 절정을 만끽한다.



이 나이에도 꼬박꼬박 일수 찍으며 출퇴근에 목을 매고 사는 나는 부글거리는 질투를 참고 상냥한 얼굴로 비바리의 애향심을 자극했다. 달러 쓰고 남의 나라 걷고 온 걸로 끝내면 안 되고 백배 천배나 아름다운 제주에 걷는 길을 만드는 게 너의 소명이라고.


스페인의 바닷가는 그의 유전자에 새겨진 서귀포의 햇살과 바다와 바람을 강렬하게 되살려주었다. 평소 가슴과 머리가 너무 가까워 열 받으면 바로 열려서 ‘왕뚜껑’으로 불리는 비바리. 오름의 분화구처럼 마그마 같은 열정이 폭발하였다.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학연 지연에 언니 동생 조카 친인척까지 엮었다. 문서수발과 관리는 평생 동지인 허영선(시인)에게 맡기고 자기는 발로 뛰는 사단법인 이사장을 맡았다. 험란한 가시밭길과 일 폭탄이 터질 줄 모른 체 두 사람은 ‘총장’ ‘이사장’이라고 깔깔대며 길 사업은 시작됐다.


드디어 첫 올레 개장 날. 흥분성 신경의 조작으로 날밤을 새고 비행기를 탔다. 출발지는 오름 밑에 나지막한 초등학교 운동장, 새파란 잔디구장이 어찌나 깜찍하던지 ‘와~와’ 소리를 질렀다. 주최측은 으쓱 엄지를 세우며 ‘감탄사는 끝까지 계속 될 거우다’ 장담을 했다. 참말이었다.


돌담을 어루만지며 오르던 등성이에서 문득 뒤돌아본 들판은 짙푸른 나무들과 검은 흙 밭이 아름다운 색 조각보였다. 오름 정상은 360도 파노라마로 거침없이 광할한 장관이다. 탄성에 보태진 신음소리(?).

앞자락은 하늘 절반 아득한 청옥빛 바다에 우도와 성산이 우뚝하게 떠있고 뒷자락엔  우람한  한라산이 큰 팔을 벌려 세상을 품고 있다. 멀리 종달리 바닷가에 따개비처럼 올망졸망한 집들은 정겨운 그림이었다.



대지를 휘몰아쳐 올라온 바람에 정신없이 따귀를 맞았다. 온몸이 펄럭 펄럭 털렸다. 일순간, 달팽이의 등짐처럼 무겁게 끌고 다니는 삶이 날아갈 듯 훌쩍 가벼워졌다. 


목장 사잇길을 걸어 순둥이 누렁소와 눈을 맞추고 다시 오름을 오른다. 온통 찔레덩굴과 가시덤불이다. 살랑거리는 바람에 새털, 뭉게, 양떼 구름등 아는 구름들은 높아진 하늘을 캔버스삼아 한가로이 노닐고 있다.


오름에서 오르가즘을 만끽하고 내려오는 길, 발걸음도 가볍고 노래가 절로 나온다. 사랑타령? 아니져어. 동요? 맞습니다아. 아기구름 나비구름 떼를 지어서 딸랑 딸랑 구름마차 몰고 갑니다....산딸기 있는 곳에 뱀이 있다고...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빨갛게 익어서 사과같은 내 얼굴로 목청껏 부른 노래들. 제주올레는 시계 바늘을 거꾸로 학예회때 명랑시절로 되돌려 놓았다.



길가 돌담 뒤로 숨어서 참았던 오줌도 단체로 누고 구부러지고 꺾고 아스팔트를 건너 종달리로 들어섰다. 마을에서 어여쁜 고향집을 만났다. 푸른 넝쿨 담장 작은 마당엔 수선화 맨드라미 봉숭아와 수돗가에 대나무까지 노부부의 사랑을 알뜰살뜰 받고 있었다. 궁둥이 붙이고 민박을 조르고 싶었는데 걸어야 할 팔자. 푸푸 세수에 얼음물을 얻어 마시고 인사를 공손히 했다. 따뜻한 인심은 걷는 자가 누리는 사치.



조개죽이 끝내 준다는 해녀의 집을 지나며 꼴깍 침만 삼켰다. 사정없이 따가운 태양도 차츰 기울어 가고 드디어 광치기 바닷가다. 성산 일출봉 꼭대기엔 관광객이 몰리지만 발치쪽 검은 모래가 깔린 해변에는 아는 사람들만 찾는다. 얕은 바다까지 넓적바위들이 가득해서 바닷물이 헤살거린다. 신발을 벗어 발은 물에 담그고 바위위에 벌렁 들어 누웠다. 돌판구이다.



걷는 동안 무수한 상념의 뭉게구름이 피어 올랐다 스러졌다. 길은 지우개다. 배낭은 무거울지라도 삶은 가볍게 휘발되어 지워졌다. 일상의 묵은 때는 바람과 파도가 쓸어갔다. 살아 있으니 걸을 수 있었고 걸으니 행복했다. 오래된 몸이 고맙다. 길에게 내 맘대로 별을 준다.

제주 올레 9성급★★★★★★★★★. 별 한개는 걷는 자의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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