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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이야기-지깁속의 뼛조각 (이유명호)

2010.01.14 16:51

yakchobat 조회 수:1348 추천:222

 

내 인생을 바꿔준 사람 -작은이야기 지갑 속에 든 뼛조각----이유명호

 

 독일의 뤼브케 대통령이 방한했던 여고생 시절이었다. 당시엔 외국 대통령이 방한하면 우리들은 한복 부대로 동

 

원되어 공항에 나가 태극기나 풍선을 흔들어야 했다. 그때 나는 여고생이 입기엔 무척 ‘점잖은’ 미색 저고리에 밤

 

색 치마를 입고 나갔다. 할머니가 엄마 헌 옷을 뜯어서 만들어준 것이었는데, 당신 딸은 윤리점수 빵점맞아도 좋

 

으니 애들 동원하는 그런 곳엔 못보낸다는 아버지의 ‘방해’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마련한 옷이었다. 할머니 같은

 

옷을 입고도 수업을 안하고 관광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가는것만 좋아라 몰래 갔던 아이가 나다. 누구에게나 아버

 

지에 대한 기억이 각별하듯, 나 역시 아버지를 좀처럼 잊을 수 없다. 아버지는 나를 무척 사랑하셨다. 군 복무 중

 

딸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탈영을 하고 싶으셨다니, 그 사랑은 원초적이랄 수밖에. 덕분에 나는 초등학교에 입

 

학해 어머니와 아버지 중 누가 더 좋으냐는 선생님의 질문에 전교에서 유일하게 아버지가 좋다는 쪽에 손을 들기

 

도 했다. 한번은 공부하는 딸의 모습을 보고 싶어 교실로 찾아와 담임선생님이 장학사인 줄 알고 놀라기도 했다.

 

아버지는 요즘 말로 하면 엽기적인 학부모로 불릴 만했다. 학교 자주 빼먹고 놀러가기를 하다보니 어느 날은 가족

 

이 광릉에 놀러 갔다가 다음날 등교해보니 담임이 바뀌어 있었다. 공부 잘하는 것보다 건강이 중요하다며 밤에 불

 

을 꺼버려 숙제를 해야 하는 나는 찔찔짜기도 했다. 중학교에 입학할 때도 아버지가 아시는 교장선생님이 훌륭하

 

다는 이유로 엄청난 하향 지원을 하라구 졸라대셨다. 이정도 웃기시는 것은 약과다. 아침밥은 가끔 온 식구와 함

 

께 허름한 기사식당이나 설렁탕집에서 아저씨들이 바글거리는 틈에서 먹어야 했는데, 교복 입고 줄레 줄레 따라

 

가는 나는 창피해서 아주 죽을 맛이었다. 밥안먹으면 학교도 못가게 하셧으니 도살장에 끌려가는 송아지꼴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엽기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아버지는 나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가시는 걸 즐겨했다. 한번은 이

 

름도 야한 ‘내시’라는 영화를 보러 갔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태풍급 에로영화라 미성년자 관람 불가이니 극장 입

 

구에서 막아서는 것은 당연지사. 아버지는 “부모가 데리고 들어가는데 무슨 상관이냐”며 극장 주인과 말다툼을

 

벌였다. 결국 그 극장에서 쫓겨나긴 했지만 아버지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단속을 안하는 동네 삼류극장에 영화

 

가 걸리면 동네언니들과 엮어서 보게 하셨다. 이후로도 충녀 화녀 등등 야한 영화들도 딸의 성교육 교재로 삼으셨

 

다. . 아버지는 이처럼 사회가 획일적으로 강요하는 권위와 질서와 가치를 생각해 보게 하고 옳지 않다고 생각하

 

면 거부하는 용기를 내게 보여주셧다. 또한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소중하게 지키며 살라는 것을 몸소 실천하시

 

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우리에게 반말을 쓰도록 하신 아버지는 이로 인해 큰아버지나 작은아버지로부터 딸 그렇

 

게 키우면 안된다는 ‘항의’를 받기도 했지만 굴하지 않으셨다. 내가 결혼할 때에도 ‘참고 살아라’라는 말 대신 “남

 

편이 한 대라도 때리면 당장 돌아오라”고 말씀하신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는 당신의 나이 47세에 경기도 여주

 

신륵사 강가에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내가 아버지의 권유로 한의대에 입학하여 본과 1학년 1학기 말 시험을

 

보던 때였다. 나의 생애 모든 걸 가르쳐주신 아버지는, 당신의 죽음마저도 내게 가르침으로 남겼다. 부모나 자식

 

등 아주 내 살 같은 이들의 죽음을 경험해봐야 비로소 생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나는

 

시간이, 건강이, 환경이 결코 기다려주지 않는 것을 아버지를 통해 배웠다. 인생이 길 수도 짧을 수도 있지만 나중

 

에 즐겁게 보내겠다는 생각에 오늘을 담보한 채 모든 것을 참고 뒤로 미루는 일은 하지 않는다. 몇 년 전 매장으로

 

묻힌 아버지의 시신을 들어내어 28년 만에 화장으로 모셨다. 화장한 가루를 강원도 구룡사 적송 밑에 뿌리고, 타

 

다 남은 뼛조각 하나는 내 지갑 속에 들어 있다. 동전의 양면처럼 삶과 죽음은 그렇게 나의 옆에 늘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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