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녀의 옷을 잃어버리지 마세요
글_김선경·사진_김상수
서울 마포에 자리한 이유명호한의원.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이유명호 원장(55세)은 밥부터 먹자고 했다. 무슨 일이든 잘하려면 먼저 밥을 잘 먹어야 한다는 것, 밥은 삶의 기본이며 잘 먹는 밥이야말로 우리 몸과 마음이 바로 서는 첫 번째 조건이라는 것이다. 주위에서 그는 밥을 잘 챙겨 주는 ‘언니’로 유명하다. 오죽하면 ‘박사’가 아닌 ‘밥사’로 통할까. 그 ‘밥’에는 이야기가 있고 즐거움이 있고, 따스한 위로가 수북이 담겨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밥을 걱정하던 그는 우리 사회가 아픈 곳을 치유하고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는 ‘밥’을 챙기는 데도 앞장서 왔다. “우리나라는 아직 차별이 많은 나라예요. 여성, 외국인, 장애인, 가난한 이들이 크고 작은 차별 속에 좌절하고 스러집니다. 나는 이들과 함께 이 땅의 모든 이들이 존중받고 서로에게 무례하지 않은 건강한 사회를 꿈꾸는 사람입니다.”
그는 꿈만 꾸지 않았다. 1997년 ‘부모성 함께 쓰기 운동’을 시작하며, 어머니의 성을 더해 이유명호라는 새 이름을 가진 뒤 본격적인 사회운동가로 나섰다. 아들 낳는 한약을 지어 달라는 이들을 보며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남아선호 사상과 성 차별을 고민하던 그는 1998년 ‘호주제 폐지 시민의 모임’을 지인들과 함께 결성했다. 2005년 3월 호주제 폐지 민법 개정안이 통과될 때까지 (그의 말에 따르면, 주방장으로서 각종 시위와 집회에 김밥과 차를 조달했다고 하지만) 그의 역할은 컸다. 그 밖에도 한국여성장애인연합, 이주여성인권센터, 문화세상 이프토피아의 든든한 지원자이며, 성폭력상담소, 막달레나의집, 월드비전 등을 후원하고 있기도 하다. 지난 한 해 여러 단체에 낸 기부금이 천만 원이 넘었을 정도.
“한명숙 전 총리가 20년 전 우리 한의원에 환자로 왔어요. 당시 민주화, 여성운동을 하던 그는 진료실을 둘러보며 ‘이 정도 크기의 사무실만 있어도 좋겠다’고 했지요. 그 세월을 넘어 여성 총리, 장애인 국회의원이 나왔으니 우리 사회도 많이 발전했습니다. 사회 운동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니까 즐겁게 해올 수 있었지요.” 조그마한 몸집 어디에 그런 에너지가 숨었을까. 몸이 약했던 그는 학창시절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양궁과 사격을 배웠다는데 무엇보다 그는 두려움을 조절할 줄 아는 법을 몸으로 터득했다.
“사실은 내가 겁이 많거든요. 산에 오르면 바위 날등도 겁나고 절벽에서는 오금이 저려 후퇴하지요. 하지만 다음번에 다시 가요. 첫 시도는 준비, 연습, 관찰이지요. 그렇게 백운대, 설악산을 다 올랐어요. 포기 대신 다음 기회를 나에게 주는 거지요.” 1988년 한의원 문을 연 이래, 여성주의 한의사로서 그의 또 하나의 화두는 ‘몸’, 여성의 몸이다. 《살에게 말을 걸어봐》,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자궁》을 펴낸 그는 ‘살 빼라, 다리를 오므려라, 겨드랑이 털을 깎아라’ 등 여성의 몸에 대한 편견이 여성의 몸을 열등하게 만든다고 지적하며, 여성 스스로 자기 몸을 아끼고 사랑하는 데서 나와 타인, 세상과의 긍정적인 소통이 이뤄진다고 했다. “욕구를 무시하고 억압하면 우리 몸에 병으로 나타납니다. 몸은 가장 정직하거든요. 내가 무엇을 원하고, 나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마음속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그러니까 병은 몸이 내준 숙제인 셈이지요. 먼저 그동안 방치한 내 몸에 미안하다 사과하고, 마음의 응어리를 찾는 것에서 숙제를 풀어야지요.”
그가 의학적인 치료 못지않게 인생 상담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성들은 단순히 몸이 아파 한의원을 찾았다가도 그동안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 둔 상처와 분노를 쏟아 낸다. 그때마다 그는 ‘당신 정말 힘들겠다’, ‘당신이 옳다’고 위로해 준다. 인터뷰 중간에도 환자에게서 온 전화를 받는 그는 마치 친언니처럼 살갑다. “요즘 행복한 거지? 숙제 잘하고 있고? 부부는 오욕칠정을 겪어야 해. 부부 사이는 도 닦는 거다, 생각하라고.” ‘병만 보지 않고 사람을 보겠다’는 것이 그의 진료 원칙. 방송과 신문에 나오는 유명한 한의사인데 진료비는 비싸겠지, 혹 만나기나 해줄까? 하고 망설이며 찾아온 환자들은 모두 그의 솔직하고 ‘즐거운’ 인품에 반한다. 한의원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우아사(우리는 아름다운 사람)’라는 모임을 만들어 이유명호 원장을 정신적인 스승으로 따를 정도다. 환자로 만난, TV 모니터 공장에서 일하는 여직원이 6개월에 하루 휴가를 낼 수 있다는 걸 알고 그녀만을 위한 산행을 계획하여 다녀온 일도 있다. 한 사람이 하나의 우주, 라고 생각하는 이유명호 원장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구슬 꿰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상대가 가진 많은 장점들을 잘 엮어 주는 역할이지요. 2%가 부족해서 불행한 사람들에게, 행복한 2%를 알려 준다고 할까요.”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가난, 이혼, 그 가운데 감옥만 안 가봤다는 이유명호 원장. 그런 세상의 쓴맛을 보지 않았다면 아마도 유한부인이 되었을 거라며 웃는다. 20여 년 가까이 한의사로 일했지만 30년 된 낡은 아파트가 전 재산. 그는 앞으로도 돈을 늘리기보다 우리 사회의 행복을 늘리는 데 더 애쓸 것이다. 10년 뒤, 20년 뒤에도 마포의 한의원에서 세상의 자매들과 울고 웃으면서 말이다. 인간은 모두 행복해져야 하고, 진보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는 그는 여성운동가를 넘어 평화운동가다. 그는 여성들에게 늘 이 말을 잊지 않고 들려준다. “자기 자신을 돈이나 남편의 명예와 바꾸지 마세요. 선녀의 날개를 잃어버리지 말고, 여자의 옷을 버리지 마세요. 여성의 힘은 참으로 무한합니다. 자신의 힘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에 써야 할지 솔직하게 드러내세요.”
이유명호의 ‘나의 아버지’ 군인이셨던 아버지는 당신에게 반말 쓰는 딸을 내버려 두셨을 만큼 생각이 열린 분이었어요.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당시에 외국 대통령이 오면 학생들이 동원되어 국기를 흔들러 나가곤 했는데 아버지는 절대 못 나가게 했습니다. 나만 달랑 빠져서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또 버스에서 자리에 앉을 때 옆 사람에게 반드시 ‘실례합니다’라고 말하고 앉으라고 당부하셨지요. 고등학교 때는 제 손을 잡고 학생입장불가 영화를 보여 주기도 하셨고요. 그런 아버지에게서 여자와 남자를 동등하게 생각하고, 인간에 대한 예의를 배우고, 주관을 허물지 않고 세상과 당당히 맞서는 힘을 얻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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