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다음 2004.11.26] - 인물/인터뷰 한의사 이유명호
“여성적 관점에서 성 행위는 ‘흡입’”
이제는 전문직 여성들도 (페미니스트로서) ‘커밍아웃’을 해야 할 때라고 봐요. 그 동안은 자신이 가진 것을 빼앗길까 봐, ‘나쁜 여자’로 찍힐까 봐, 두려웠기 때문에 감추었던 것이죠. 어떤 사람들은 그럭저럭 살만하고 차별 때문에 불편하지 않으니까 그냥 현실에 안주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하지만 불합리와 싸우는 운동은 능력이 되는 사람들부터, 할 수 있는 사람들부터 참여해야 되는 것 아닌가요?”
TV 건강 교육자로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이유명호씨는 우리 사회에 낯선 모습으로 등장했다. 날 것의 언어로 성을 스스럼 없이 얘기하고, '안티미스코리아 대회’에 출전해 트레이드 마크인 꽁지머리를 휘날리며 거침없는 에로댄스를 추는 50대의 한의사를 우리는 이태껏 본 적이 없다.
그는 여성계에서 더 유명한 한의사다.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 운영위원, ‘여성정치인 경호운동본부’ 열혈 본부원, 여성장애인연합회 이사 등으로 활발히 활동할 뿐만 아니라 월경 페스티벌 등 각종 여성 행사에 꼬박꼬박 기부금을 내고 있다.
전공을 살려 TV 강연과 저술활동 등을 통해 ‘여성의 몸’을 홍보하는 데도 열심이다. 2001년 펴낸 책‘살에게 말을 걸어봐’에서는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몸을 혹사하는 다이어트를 중단하고 건강을 위한 다이어트를 할 것을 주장했다. 올해 4월 발간된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자궁’에서는 생명을 잉태하는 여성의 몸이 얼마나 경이롭고 소중한 ‘명품’인지를 설명하고 여성들이 자신의 몸을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여성학자, 여성 운동가들은 많지만 의사, 변호사, 판검사 등 능력 있는 전문직 여성들의 ‘페미니스트 선언’은 찾아보기 힘들다. 잘 나가는 여성들은 페미니스트이기를 거부하고 휴머니스트를 자처한다. 고소득자로 인생을 편히 즐길 수 있는 위치의 그가 왜 ‘점잖지 못한 언행’을 고집하며 ‘작은 전쟁’을 시작한 것일까?
“나이 먹었다고 기죽기 싫었어요. 세상이 정해준 코드대로 옷 입고 말해야 한다는 틀이 싫었어요. 마음 내키는 대로 놀지 말라는 세상의 강요가 싫었어요. 그냥 돈 잘 버는 한의사로‘명품족’으로 살 수 있었겠죠. 그런데 ‘배부른 돼지’의 삶은 의미가 없어요. 인간이 세상에 나는 이유는 사랑하며 살라고, 실컷 놀고 공부하기 위해서죠. 제가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남들의 편견 때문에 제가 누리고 싶은 것들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에요.”
여성주의 한의학 전파하며 사회에 충격을 던지다
어려서부터 ‘여자라고 차별받지 않는 가정’에서 자라났고 공부도 잘 해 한의대를 졸업한 그에게 세상은 불공평하고 불합리한 것 투성이었다. 양보심 많고 고분고분한 여자들이 울화병, 속병에 시달리는 한국. ‘나 혼자 편하고 말자’고 침묵하기에는 마음이 아팠다.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는 ‘이유기획’으로 불릴 정도로 아이디어와 의욕이 넘치는 그는 여성주의 한의학을 전파하며 사회에 충격을 던지기 시작했다.
한번은 혼전 동거에 관한 TV 토론에 출연했다. 드라마 ‘애정의 조건’에 등장하는 '혼전 동거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4명의 패널은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출연자 중 이유씨 혼자서만 찬성이었다. 시작부터 4 대 1의 불리한 싸움이었다. “혼전 동거가 왜 나쁘냐, 오히려 피임 교육을 잘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아들에게 콘돔을 사줬던 일화를 얘기하자 이번에는 인터넷 게시판에 난리가 났다. 돌이켜보면 방송이 어떤 것인지를 모른 채 너무 겁 없이 순진하게 덤볐다는 생각마저 든다고 했다.
“인터넷에 입에 담기 힘든 비난도 많이 올랐죠… 제가 아들한테 콘돔을 사줬다는 이유만으로 콩가루 집안이라고 매도당하기도 하고요.(웃음)”
사회의 선입관에 반하는 사람, 특히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오해와 공격에서 그도 자유로울 수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TV 출연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다. “동거하다가 버림받은 여자는 먹다 남은 참외 쪼가리” 같은 반여성적, 반인권적 언사가 난무하는 TV의 야만적 보수성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구성애는 청소년용, 나는 성인용”
거침없이 여성의 생식기와 성에 대해 얘기하는 그에게는 ‘한의학계의 구성애’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구성애식 성교육에 대한 견해를 물었더니 “구성애는 청소년용, 나는 성인용”이라는 해석을 내린다.
"구성애씨의 성교육이 남성 중심적이다, 너무 순결지향적이라는 등의 지적들을 하는데 그건 그런 식의 메시지가 아니면 보수적인 TV 매체에서 건전한 성담론을 시작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어요. 구성애 선생은 청소년용, 저는 성인용이라고 생각해주셨으면 해요.(웃음) 저는 구성애 선생의 활동으로 인해 정말 많은 게 바뀌었다고 보고 높이 평가하고 있어요. ‘아이들의 자위 행위를 어떻게 볼 것인가’부터 시작해서, 아동 성학대 문제까지 음지에서 왜곡됐던 문제들이 수면 위로 불거졌어요. 그런데도 한계부터 지적하는 사람들을 보면 왜 긍정적인 것을 보려 하지 않고 흠만 잡으려고만 하는지 이해가 안 가요.”
“폐경은 완경(完經)” “남성중심의 가계도, 다시 써야 한다”
그는 “지금까지 현대 의학은 철저히 남성의 시선만을 반영하고 있다”며 “여성의 몸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우리나라 대부분의 여성들은 게을러 보일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우리 나라 여성들은 대부분 뇌혈압이 낮은 저혈압증에 시달리고 있어요. 소음인이면서 저혈압증인 여성들은 보통 ‘달빛형 인간’이라 아침 시간에는 힘이 없고 집중력과 원기가 떨어지죠. 여성의 체질과 특성에 대한 파악 없이 물리적인 근력과 속도만을 중시하는 산업사회의 시각에서만 보면 이런 증상의 여성들은 대개 늦게 일어나 남편 밥도 안 차려주는 게으른 여성으로 매도되기 일쑤죠” 그는 여성의 생리를 ‘피로 쓰는 경전’이라고 정의한다. 생리는 더럽고 불편한 일이 아니라 생명을 태동시키는 성스러운 과정이라는 것. 그는 또 “수정 과정은 정자가 아닌 난자 중심으로 이뤄진다”면서 “남성 중심의 혈육 개념도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부계로는 전혀 피가 통하지 않아요. 가계도는 다시 씌어져야 합니다. 딸,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의 어머니로 혈육은 거슬러 올라갑니다. 남자들은 그 옆으로 붙여지는 게 맞아요. 난자는 태아의 살이 되고, 피가 되지만 남자들은 어떤 피도 태아에게 주지 않아요. 정자는 그저 약간의 유전 정보만 전달하는 것 뿐이에요. 가장 빠른 정자가 난자에 도착해 착상되는 것이 아니고, 난자가 수 많은 정자 중에 쓸만한 정자를 받아들여 스스로 착상하는 거에요. 섹스 행위도 ‘삽입’이 아니라 ‘흡입’이라는 말이 더 정확하죠. 폐경이라는 말도 없어져야 해요. 난소가 힘든 일을 완수하고 휴식을 취하는 ‘완경’이라고 표현해야 합니다. ”
일부에서는 페미니즘을 대단히 과격하고 투쟁적인 운동으로 한정하며 페미니스트들에게 대단한 도덕심과 공명심, 자기 희생을 강요한다. 그러나 그는 페미니즘이라는 말이 없어 지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로 이분법적인 편가르기나 편협한 투쟁성을 지양하는 편이다.
“생리 휴가가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여성들이 불평등한 상황에서 보호를 필요로 하는 존재였다는 것을 반증하죠. 남자들과 경쟁하는 직장에서 ‘나 생리 휴가 쓸래’ 하면 자처해서 ‘짤리는’ 거랑 같죠. 생리 휴가 같은 것은 없애도 좋아요. 여자도 군대 가는 것에 찬성이고요. 다만 의무를 부여하면 동등한 권리도 주어야죠. 최소한 호주제 같은 것은 폐지한 다음 여자들에게 의무를 요구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여성과 남성이 상생하는 ‘남녀공화국’을 위해서 그는 여성들이 좀 더 강해지길 원한다. 여성들을 만날 때마다 “사회의 불평등과 차별의 벽이 많지만 그렇다고 도전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다그친다.
“여성들에게는 먼저 행동하고 그 다음에 요구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현실에 존재하는 장벽을 극복하지 못한 채 문제만 지적하면 ‘싸움닭’이라는 소리 밖에 못 듣지요. 최선을 다해 일한 다음 당당하게 싸우고 요구하라고 말합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진료를 시작한 그의 힘찬 목소리가 진료실 바깥까지 쩌렁 쩌렁 울린다. 세상이 강요하는 ‘주류 코드’에서 일탈했지만 ‘나쁜 여자’라는 낙인 대신 존경을 얻은 한의사 이유명호. 여성들의 몸에 대한 당차고 발칙한 주장들을 담은 ‘이유명호 바이러스’가 움츠려있던 여성들의 기를 살리고, 여성의 몸에 대한 ‘편견의 암(癌)’을 조금씩 죽여 나가고 있는 건 아닐까.
풀처: 미디어다음
심규진 기자 / 사진=김준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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