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의다윗들] ⑤ 남녀차별 '한국병' 호주제폐지 '일침'
“호주제 폐지로 남녀불평등의 고질을 뜯어고쳐야 대한민국의 혈이 제대로 순환할 수 있을 겁니다.”
한의사 이유명호(48)씨는 마치 진맥을 한 뒤 `일침'을 놓듯 입을 열었다. 1989년 개업한 그는 벌써 12년째 병자들의 건강과 평온을 위한 의술을 펼쳐왔다. 하지만 그의 진맥과 처방이 진가를 발휘하는 곳은 따로 있다.
남아선호 사상과 남녀불평등의 `국민병'이 그것이다. “가족의 테두리 안에선 3살짜리 손자가 할머니보다 우월하고, 모든 남성은 여성보다 우선권을 갖습니다. 이런 남녀불평등을 `법'이 앞장서 보장하고 조장한다는 건 시대착오적인 일이죠.” 대한민국의 모든 여성에게 `울화병'을 안기는 것은 민법 778조, 781조, 826조 등의 호주제 관련 규정이다. “호주제는 국가공문서에 호주를 기본으로 해 가족을 편제함으로써 남아선호 사상과 가부장의식을 부추기는 `악법'입니다. 그 결과 1년에 3만명에 이르는 여아가 낙태되고, 현대사회에서 급증하는 이혼, 재혼, 미혼모 가구를 `결손가정'으로 취급하게 되는거죠.”
아들을 꼭 낳아야 돼 이유씨는 지난 96년부터 호주제의 폐지를 위해 사회 곳곳에 진맥과 처방의 손길을 뻗쳤다. “`아들낳게 해달라'며 한의원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요. 96년 `여성한의사회'에서 그런 요구 때문에 엉터리 처방을 하지말자는 운동을 시작했죠. 그러다 무엇이 이런 `남아선호사상'을 지탱하고 있는지 고민하게 됐고, 결국 그게 호주제임을 알게된 겁니다.”
호주제 폐지를 위해 처음 잡아낸 `혈'은 `부모성 함께 쓰기운동'이었다. 97년 3월 어머니의 성을 더해 이유명호라는 이름을 새로 가졌다. “`나'를 규정하는 것이 호주인 아버지만이 아님을 몸소 실천하는” 변신이었다.
동참자가 늘면서 98년 12월 `호주제폐지 시민의 모임'이 결성됐고 올 10월 시민단체 등이 가세해 `호주제폐지시민연대'가 만들어졌다. 2만5천명의 서명으로 호주제 폐지에 대한 국회청원도 했다. 내년 초에는 남녀평등권과 혼인생활의 평등권을 보장한 헌법조항을 들어 호주제에 대한 위헌소송도 제출할 계획이다.
그러나 이유씨와 그의 동료들 앞에는 `성편견'이라는 거대한 방벽이 놓여 있다. “군대가서 `총알받이'나 해보라는 폭언까지 들었어요. 그러나 우리의 상대는 `남성'이 아니라 남녀 모두를 굴레에 묶은 `법과 국가'입니다.”
국회청원과 위헌소송을 시작하며 처음 50명에 불과했던 호주제 폐지시민모임의 회원은 지금 1000여명으로 늘어났다.“아직 갈 길이 멉니다. 그러나 성폭력 방지법과 동성동본 금혼제도의 폐지가 그랬듯 여성의 권익을 살리기 위한 노력은 반드시 그 결실을 맺을 겁니다.” 결코 쓰러지지 않을 듯 보이는 `성차별'의 `골리앗'을 향해 한의사 이유씨가 내리는 처방이자 진단이다.
안수찬 기자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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