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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노동' 전전하던 나, 요즘 대한문으로 출근합니다-이명옥 (오마이뉴스 )2018.07.12 11:05 '극한노동' 전전하던 나, 요즘 대한문으로 출근합니다
요즘 나는 대한문으로 출근 중이다. 서른 번째 사회적 타살인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고 김주중 조합원을 추모하는 분향소가 두 번째로 대한문에 차려졌기 때문이다. 사회적 연대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내 생이 실패로 점철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성장하며 통과해야 할 몇 개의 문이 있다. 입시, 취직, 결혼은 인간이 살아가며 대부분 비껴갈 수 없는 중요한 통과 절차다. 나는 세 개의 문을 통과하면서 모두 실패를 맛봤다.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고, 반듯한 직장을 가져보지 못했다. 마지막 도피처로 선택한 결혼은 내게 가장 큰 패배감을 안겨 주었고 아직도 그 굴레에 갇혀 있다. 다행인 것은 실패의 대가로 뒤늦은 깨우침이 뒤따랐고 그 깨우침이 삶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선택에는 늘 희생이 따른다고. 입시 지옥에 갇혀 사는 청소년들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그들의 선택이나 의지가 아닌 수많은 희생을 강요당한다.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현재의 꿈, 시간, 삶을 저당 잡힌 청소년들, 그렇게 강요당한 대가를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 채 시들어 가는 청소년들이 얼마나 많은가. 다행히 나는 나의 실패를 자식에게 투사해 보상받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때문에 입시를 위해 아이의 시간을 희생하라고 강요하지 않고 자유 의지에 맡겼다. 과정으로서의 실패 역시 아이의 몫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지식이 없던 나는 반듯한 직장을 가져 본 적이 없다. 또 특별히 조직에 속한 사회생활을 하려 노력하지 않았다. 학업이냐 사회생활이냐 구체적인 목표를 정하지 못하고 유예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용돈을 벌어 쓰고 있었고 결혼이 아니고는 절대 독립은 불가능하다는 사고를 지닌 부모님 때문에 부모의 그늘에서 혜택을 누렸던 셈이다. 공부를 해서 전문지식을 쌓는 대신 결혼을 선택한 것은 내 생의 가장 큰 실패가 됐다. 결혼의 실패는 이전에 실패했던 두 관문의 무게까지 실어 나를 압박하는 요인이 됐다. 반듯한 학벌이나 전문 지식 없이 40대 기혼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보험, 보습학원 강사, 무가지 신문 배포 도우미, 신문사 마케팅 부서, 베이비 시터, 방문 학습 교사, 인터넷 방송 진행자, 출판사, 장애인 복지 신문 총무가 내가 거쳐 온 일들이다. 그 일들은 대부분 비정규직 일자리로 일자리의 안정이 보장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깨우치게 됐다. 세상은 절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곳이라는 사실과 권리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 사실을. 소극적이고 내성적이던 나는 세상과 어울려 살지 못했다. 여럿이 어울려 다니는 모습을 보면 조금 한심하다는 생각마저 했을 정도다. 고치 속 애벌레처럼 온실 속 화초처럼 부모의 그늘에서 세상 풍파로부터 보호받던 시절의 내 모습은 이기적인 인간 그 자체였다. 내 방의 물건을 누가 만지거나 허락 없이 들어오는 것도 용납을 못했다. 동생도 허락 없이 내 책장의 책을 꺼내 가지 못 할만큼 까탈스러웠다. 과외로 용돈을 벌어 프랑스 문화원으로 영화를 보러 다니고 좋아하는 음악 테이프를 사고, 책을 읽으며 소일했다. 프랑스 사람과 한국인 지인 몇 명이 함께 갔던 강화도 여행에서 당한 교통사고가 아니었다면 실패한 결혼은 내 생의 역사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개인의 역사에도 가정법은 적절하지 않지만 말이다. 87년 교통사고를 당해 2년 가까이 병원 생활을 하다 퇴원을 했다. 내 나이 서른 둘, 병원 생활에 지쳤던 나는 누군가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그저 마음 편히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89년 11월 중매로 서너 번 본 사람과 결혼을 했다. 내 결혼의 가장 큰 목적은 독립과 경제적 안정이었다. 그러나 결혼은 오히려 두 가지 모두를 속박하는 굴레가 됐다. 결혼은 시집으로의 예속이었고 남편은 경제력이 없어 나는 본격적으로 생계를 위한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10개월 된 아이를 둔 엄마가 달동네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었다. 나는 한 개에 이원 하는 라디오 부속품 부업과 한 개 만들면 십 원인 머리띠를 만드는 부업을 했다. 새벽 두 시까지 일해도 몇 만 원에 불과한 극한 노동이었다. 이후 보습학원 강사와 보험회사를 다니며 악착같이 저축을 하고 보험을 들었다. 혹시 내가 없더라도 아이만은 교육을 제대로 받았으면 좋겠다는 바람 하나로 목숨 걸고 살던 시절이었다.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IMF가 터졌다. IMF는 이를 악물고 버티며 살아온 내 삶을 또다시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아이를 위해 악착스럽게 모았던 저축과 보험 2천만 원은 일자리를 잃은 후 7개월 만에 한 푼 없이 날아갔다. 또 한 번의 좌절과 실패였다. 그 때문이었다. 인터넷에 소소한 글쓰기를 시작하며 방송대 국문과에 늦깎이로 입학한 것은. 2002년 나는 <여성신문사>에 입사했다. 소소한 생활글을 쓰며 홈페이지를 관리할 전문대 이상 졸업자를 찾는다는 광고를 보고 이력서를 넣었다가 들어간 곳이다. 내가 간 곳은 마케팅 부서였는데 실제론 소소한 회계와 잡다한 업무가 복합된 일이었다. 부채로 불안정 했던 신문사에서 8개월 가량 일을 하다 해고됐다. 좀 일찍 노동자의 권리에 눈 떴더라면 아마 그대로 해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2003년 몸의 병만이 아니라 마음의 병까지도 관심을 갖는 이유명호 한의사를 만났다. 이유명호 선생은 내게 날개를 달아 준 생의 전환점을 만들어 준 여성운동의 대모다. 그이를 만남으로 나는 더 이상 무임승차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함께 할 수 있는 연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관련기사 : 이 땅의 딸들에게 날개를 달아준 그녀). 이후 나는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밀양, 구미, 울산, 제주도, 평택 쌍용자동차, 세월호 등에 연대하며 거리에 서는 날이 많아졌다. 거리 인생이 된 셈이다. 영혼의 틈새마다 빽빽하게 끼었던 비계 덩어리인 무기력, 나태, 이기심, 열등감,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늘 좌절하고 자신에게 화를 내며 분노하고 있던 내 모습을 직시할 수 있도록 깨우쳐 준 덕분에 나는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웠다.
뿐만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인 부지런한 발로 한 장의 현장 사진으로 사람들의 연대의 힘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여성신문사>에서 해고당한 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오마이뉴스>에 글쓰기를 시작했고 호주제 폐지 등 여성 운동에 눈뜨게 됐으며 발로도 연대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으니 실패가 또 다른 길을 열어 준 셈이다. 돌이켜 보면 내 삶은 늘 실패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실패 덕분에 나는 세상으로 나와 사람들과 함께 하는 값진 연대를 배웠다. 만일 요즘 유행하는 카피 문구처럼 '꽃길만' 걸었더라면 아마도 삶의 지형은 지금과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사회적 연대와는 무관한 나만 잘 먹고 잘 사는 길, 내 아이만 잘 되면 된다는 마음으로 아이를 무한경쟁으로 채찍질하며 내모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실패의 삶이 가져다 준 깨우침은 나를 더 사람답게 만들어 주었고 내 삶을 더 가치 있게 해 주었으니 '아름다운 실패'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
댓글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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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옥 기자가
이 글을 보내줬다오.
결혼하면 남편이 먹여살려줄거라는
환상을 안고. 중매로 덜컥.
그 배후에는 딸을 치워버리려는
부모가 있었고.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