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집에서 컴터를 안킨다.
집 컴터가 꼬지고 바이러스도 먹고 (주인잘못만나)
느린데다.
결정적으로 내가 눈이 나쁘다.
한쪽 눈은 안경으로도 시력교정이 안나오고
쓰고도 0.2 .
그래도 아껴쓰고 보살펴서 세상구경
오래도록 해야지.
내별명은 /병아리 오줌이엇다.
심청이 동냥젖뿐만 아니라. ㅎㅎ
하도 졸졸 울어대서.
야단 맞기도 전에.아부지한테 억울함과 나의
무죄증명을 하기도 전에.
조목조목 야그를 해야만 할 순간에
눈물부터 나와버린다. 억억 흑흑.
드라마 개그프로를 보면서도 울다보니
엄마의 눈물에 질색하는 아이들은
벌금을 정햇다. 500원.
차라리 벌금을 내고 맘 놓고 울기도 했었는데.
아래는 조선희 작가의 야부리야부리 쫄깃한 글이다.
요즘 펑펑 울어지지 않는 삭막한 마음이
까칠한 피부처럼 나이듬의 증거아닌지.
어디 질좋은 안약도 없을까.
책 읽어주는 남자 보면 눈물이 날까? 보아님은 어땠어?
황사가 한달은 갈듯 싶다.
봄나무에 물오르듯
흠뻑 비나 맞았으면 싶은 날들이다.
2%는 커녕 50%쯤 부족한 진액부족을 위하여
눈물샘을 채워줄 보리차라도 마셔볼 일이다.
어디 질 좋은 안약 없을까
눈물이 점점 말라가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는 것 같다
내 어렸을 적에는 저녁이 되면 온 식구들이 실컷 울 준비를 하고 <저 눈 밭에 사슴이>나 <검은 십자가>같은 연속극을 들ㅇ러 라디오 앞에 모였다. 위가 학교에서 <저 하늘에도 슬픔이>를 단체관람 하러 갈 때 엄마들은 손수건을 챙겨들고 <미워도 다시 한번>을 보러 극장으로 갔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인지 '나는 콩사탕이 싫어요'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쨋든 '반공소년 이승복'을 기리는 동요의 마지막 소절"그름도 울고 넘는 운두령고개/하늘도 성이 났다/오랑캐들아"를 부를 때는 얼마나 비장했던지. 1974년 8월 육영수 여사가 세상으 떠났을 때 중학교 3학년생이던 나는 또 얼마나 울었던가 언니들과 엄마도 함께 대통령 부인의 장례식 TV생중계를 지켜보면서 눈이 퉁퉁 붓도록 대성통곡했다.
어쩌면, 그74년 무렵이 한국사회에서 중세의 마지막 날들이 아니었을까. 사회의 공기는 어둡고 무거웠으며,대중은 독재자 일가의 비운에 연민을 느낄 정도로 착하고 순진하고 너그러웠다. 아니 그보다는 차라리, 정치사회적 억압이나 빈곤이 대중 정서의 밑바닥에 우울한 정조를 깔아놓아고,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다'는 격으로 그 집단우울증이 신파 드라마든 대통령 부인의 죽음이든 뭔가 출구를 찾고 있었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잘 울고 쉽게 감동하는 경향이 중세 사람들의 특징이었다고 중세학자 호이징가는 말했는데, <중세의 가을>이란 책을 보면 왕의 장례때는 여러 날 동안 도시 전체가 통곡과 울부짖음에 푹 잠겼다 한다. 하지만 곧 80, 90년대로 넘어오면서 한국사회의 공기는 좀더 밝고 가벼워졌으며 대중은 영리하고 '쿨'해졌다. 이제 비로소 한국인들이 정서적으로 현대인이 되었다고 할까.
즐거움에 비해 슬픔에 인색하고, 감정보다는 이성에 의지하며, 집단의 이데올로기보다 자기 개인의 판단을 중시하고, 남을 쉽게 믿지 않으니 설득하기도 힘든, 그런 현대인이 된 것이다. 정신의학으로는, 과도한 비분(悲憤)에 빠져드는 소아병과 신경증을 극복하면서 성숙하고도 정상적인 정서기능과 사고기능을 되찾았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대사회 속에서 감정이 생기를 잃어간다는 말도 맞는 것 같다. 감정이 생기를 잃어간다는 지적을 한 사람은 에리히 프롬인데, 그는 사회가 개인에게 어릴 적부터 주로 '적개심과 혐오감을 억제하고 감정 표현을 자제하도록' 가르치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대신, 영화나 유행가가 감정에 굶주린 대중을 흥분시키는 역할을 해준다는 것이다.
나 역시 최근 가장 감동한 일을 가만히 떠올려 보면서, 그것이 실제 생활에서가 아니라 영화에서라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 순간, 당황하게 된다. 특히 내가 눈물을 흘린 기억이 있다면 십중팔구는 내 처지를 슬퍼하거나 주변의 누군가 때문이 아니라 영화관 객석에 앉아서였다.
물론 실생활에서도 감동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사소하게 이것저것 생각나는 게 없지 않지만 감동의 레벨이 <그녀에게>에 는 턱도 없다. 또 감동했다 해도 영화를 볼 때처럼 감동에 겨워 눈물을 흘리는 정도는 아니다.
근래에 본 영화를 대강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니, <똥개>와 <장화,홍련>에서 한차례씩 눈물이 났고 <무간도>와 <디 아워스>에서도 왠지 슬퍼서 울었고 <그녀에게>를 개봉관에서 다시 보았을 때는 첫 장명부터 벌써 울기 시작했다.
나는 워낙 쉽게 잘 운다. 간단한 신파장치 앞에서도 백전백패, 반드시 울고 만다. 그래서 내가 중세적 인간 아닌가, 내 정서에 어떤 퇴행성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해보기도 한다. 어떤 터무니없는 신파영화를 보다가 울고 짜고 나오면 남 보기도 부끄럽고 내 스스로도 한심한 생각이 든다. 하지만 <오아시스>나 <그녀에게>같은 영화를 보면서 울고 나면 기분 좋은 카타르시스의 여운이 오래 남는다.
내가 그동안 스크린에 뿌린 눈물을 다 주워 담으면 드럼통 하나는 될 것이다. 그 눈물의 힘으로 내 정서는 적당히 촉촉했고 감정도 적당히 생기를 유지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만성적인 안구건조증에 인공눈물과 같은 효과라고나 할까. 장마비는 추적추적 내리지만 내면은 황량하게 메말라 있는데, 어디 질 좋은 안약이 또 없을까.
조선희/ 여자에 관한 일곱가지 거짓말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