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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수의 사람 그물] 넘어졌을 때...
한겨레 오늘 칼럼.~~퍼왔슈,


매주 수요일 안산에 있는 ‘치유공간 이웃’은 뜨개질 공방으로 변한다. 색색의 실이 곳곳에 널려 있고 엄마 수십명이 바삐 손을 놀린다. 그리움과 미안함, 분노와 고통을 잊기 위해 시작된 뜨개질이라 겨울도 없고 여름도 없다. 15개월째 한 주도 거르지 않고 계속되는 풍경이다.


한때는 뜨개바늘로 무장한 탱크부대의 돌격처럼 몰두했고 때론 묵언수행하는 수도자들의 명상터 같고 때론 엄마들의 수다가 오가는 동네 빨래터가 된다. 엄마들의 전언에 의하면 뜨개질을 하는 동안엔 슬픔과 고통을 잊는다. 그러니까 엄마들에게 뜨개질은 진통제다.

노벨 의학상을 신청하자는 농담을 할 만큼 부작용이 전혀 없는 신묘한 약제다. 그동안 실값만 4천여만원이 들어갔다. 온전히 약값이다.


뜨개질 얘기를 전해 들은 어떤 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 식으로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잠시나마 통증이 줄었을 때 엄마들은 편안해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안 아파도 되나 불안해하고 엄마의 자격을 의심한다.


그런 때 엄마들에게 통증 없음은 잠시고 곧 사경을 헤매는 고통이 다시 닥쳐올 거라고 말해주면 그제야 안도한다. 실제로도 그런 걸 아니까 금방 수긍한다.


살다 보면 어깨 위에 산 전체를 걸머지는 고통과 벼락처럼 마주할 때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믿었던 관계가 깨지고, 곤두박질하듯 무일푼 신세가 된다. 당혹스럽기도 하고 힘에 겨워 무릎이 꺾여 넘어진다. 그럴 때 사람들의 반응은 거의 같다. 일어나는 방법을 잊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걸을 수 있는지 알고 싶어한다. 살고 싶어서다.


트라우마 현장 경험이 누구보다 많은 치유자 정혜신의(경우) 처방은 매번 같다. 걱정할 거 없다. 지금은 놔둬야 되는 상태다. 꺾였을 때는 더 걸으면 안 될 만한 이유가 있는 거다. 충분히 쉬고 나면 저절로 걷게 된다.


원래 당신은 스스로의 다리로 걸었던 사람이다. 다리가 부러졌을 때 깁스도 없이 정신력만 앞세워 걷겠다고 바로 나서면 다리 근육과 신경, 혈관이 파열돼 다리를 절단할 수도 있다. 뼈가 붙으면 그때부터 걷기 연습하면 된다.


태산 같은 고통 앞에선 누구나 당황스럽고 무기력해지고 혼돈스럽다. 그런 때 분노를 조절할 수 없고 누군가를 죽이고 싶고 내가 미쳐가는 것 같은 감정은 정상이다. 지극히 비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비정상적인 리액션이 정상적이다. 그걸 알아차리는 게 중요하다.


나를 둘러싼 환경이 다 붕괴됐는데 나마저 잘못되었다고 느끼면 누구도 버틸 수 없다. 무슨 수로 견디나. 무너진 세상을 복원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럼에도 사람이 살아남는 건 무너지는 세상 앞에서도 나를 지킬 수 있을 때다. 세상이 무너져도 나는 무너지지 않았다는 자각을 할 수 있어야 살 수 있다.


트라우마 치유에선 되는 부분과 안 되는 부분의 경계가 확실하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슬픔, 그리움, 통증은 죽을 때까지 등가로 유지된다. 아이가 살아 돌아오지 않는 한 이걸 줄여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런 때 트라우마 치유의 목표는 그런 고통을 짊어지고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그걸 견딜 수 있는 심리적 힘, 즉 ‘자기’를 지지해주는 것이다. 장기적인 심리적 지지체계와 연대를 구축하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가까운 이웃, 먼 이웃이 필요한 순간이다.





이웃이란 누군가 넘어졌을 때 옆에서 꾸준하게 지켜봐주는 존재다. 그래야 내가 넘어졌을 때 누군가는 또 내 이웃이 되어준다. 세월호 연대를 언제까지 해야 하느냐 묻는 다정한 이웃에게 전해주고픈 응원의 답이다. 지금, 어딘가에서 치명적으로 넘어져 있는 이들에게도.
이명수 ‘치유공간 이웃’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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