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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걷기 (서명숙 제주올레이사장)

2008.10.30 11:06

약초궁주 조회 수:2928 추천:329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놀멍쉬멍걸으멍 제주걷기 여행저자)이

작은숲에 기고한 글을 베꼈습니다.

둘이 강화벌판을 석삼년 헤메고 다녔지요.

이후 시명숙님은 산타아고를 거쳐 고향 제주에서 올레길을 만들며

걷고 또 걷고 있습니다. 주구장창...

가끔 아름다운 경치에 겨워 마포 한의원에서 구부정하게 침 놓고 있는 내게

염장질을 합니다. 전화로~~~우리 온냐 썩은 공기속에서 맨날 일만하니

너무 불쌍하다. 이러면서. ㅠㅠ

 

 

행복한 걷기

 

-서명숙<제주올레>이사장

 

  인생의 중턱 고갯마루에서 심하게 휘청거렸다.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가 빠개질 것 같았고, 오후면 눈알이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그토록 좋아했고 천적이라 생각했던 언론사 기자일이 끔찍하게 싫어졌다. 20년 넘게 피 말리는 마감에 ?기면서 다른 언론다, 동료 기자들과 특종 경쟁을 하느라고 피폐해진 몸과 마음은,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면서 강한 경고음을 울려대고 있었다.

 

  2003년 초부터 지친 몸과 슬픈 마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다행히 걷기는 바짝 마른 내 마음에 윤기를 불어넣고, 불어난 체중은 줄여 주었다. 그뿐인가. 주변의 자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세상은 얼마나 살만한 곳인지를 조근조근 일러주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길은 종종 허망하게 끊어지거나 사라지고 말았다. 아예 사람은 걸을 수 없는, 차들만 오만하게 달리는 길은 또 얼마나 많던지.....자꾸만 갈증이 나고, 참을 수 없는 허기를 느꼈다. 온종일, 내 몸이 지쳐서 그만두고 싶다고 외칠 때까지, 내처 걸어봤으면 하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까미노 데 산티아고(산티아고 가는 길)'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그즈음이었다. 성야고보가 예수 사후에 스페인 전역을 전도하면서 걸어간 길,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옛길, 장장 800km에 이르는 도보순례자들의 성지라는 그 길!

 

  그 길에 마음에 품은 지 3년만인 2007년 가을에 마침내 길을 떠났다. 그해 9월 10일 프랑스 국경마을 생장피드포드에서 출발해 순례길의 마지막 도시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한 것은 10월 15일, 36일만이었다. 여한 없이 걸으면서 바쁜 생활에 쫓겨 내팽겨쳤던 자신을 재발견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게 된 나날이었다.

 

  그곳에서 이상하게도 고향 제주가 자주 생각났다. 피레네를 넘으면서는 한라산의 윗세오름을, 산중마을 만자린을 지나면서는 중간산 마을들을, 대서양 연안의 땅끝마을 '피니스떼라'에서는 유년시절을 보낸 서귀포를.....

 

  그 길 위에서 생각했다. 제주의 옛길, 사라진 길, 다정한 올레('거릿길에서 대문까지의, 집으로 통하는 아주 좁은 골목길'이라는 뜻의 제주도 방언)들을 되살릴 수는 없을까. 끊어진 길을 다시 이을 수는 없을까. 그 길을 혼자, 때론 친구나 연인과 함께,유유자적, 휘적휘적, 간세다리(게으름뱅이를 뜻하는 제주도 방언)가 되어 걸어갈 순 없을까. 제주에 그런 도보 길이 생긴다면 어지럼증이 생길 만큼 빠른 속도, 각박한 도시생활, 각종 첨단기기에 포위된 일상을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큰 위안이 될텐데...

 

 이어도가 따로 있다던가. 평화와 행복을 준다면 그곳이 이어도인 것을. 그러나 그 길을 내가 만들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지방정부나 회원이 많은 시민단체가 만든다면 그 길을 걸을 텐데, 왜 그런 길 하나 못 내는 걸까, 원망 섞인 상상만 했을 뿐.

 

  여행이 거의 끝나갈 무렵 산중마을 멜리데에서 영국 여자 헤니와 우연히 동행이 되어 한나절을 걸었다. 그녀는 문어요리집에서 맛난 문어찜을 먹던 중 내게 놀라운 제안을 했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처럼 스페인을 찾을 수는 없다. 우리가 누린 이 행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줘야 한다. 귀국하면 너는 너의 길을, 나는 나의 길을 만들자.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그곳에서 쉬어가고 위안을 얻을 수 있도록."

 

  귀가 번쩍 틔었다. 사실 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사람이 있었다. 절친하게 지내던 한의사 이유명호 선배가 강화도 민통선 철책 길을 여러 차례 걸으면서 '제주와 강화에 걷는 길을 만들자'고 꼬드겼지만, 그때만 해도 그녀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 먼 나라까지 찾아와서야 비로소 제 나라에 걷는 길이 필요하다는 것을, 길을 걷는 사람은 길을 만들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귀국한 뒤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기회가 닿을 때마다 그 소망을 이야기 했더니,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깊이 공감해 주었다. 가까이 지내던 여자 선후배들은 도로가 더 뚫리고, 건물이 더 들어서기 전에 하루 속히 내려가서 길을 만들라고 성화였다. 급기야 나는 제주에 걷는 길을 만드는 일에 도전하려고 아예 고향으로 귀향하기에 이르렀다. 사단법인 <제주올레>를 발족하고 첫 코스(시흥 말미오름-광치기 해안)를 선보인 것은 지난해 9월8일.

 

 

  그 뒤 1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코스도 어느덧 9개로 늘어났고, 총 길이도 140km를 넘어섰다. 그 길 위를 숱한 올레꾼들이 걸었다. 혼자서, 둘이서, 친구끼리, 동서지간끼리, 자매끼리, 동창생끼리. 엄마 손을 잡고 온 다섯 살 배기 남자애도 있었고, 두딸의 응원을 받으면서 완주한 팔십 노모도 있었다. 나처럼 끝없이 계속되는 생존경쟁에 치여 지치고 상처받은 영혼들이 이 길을 찾아왔다. 중학생 아들을 사고로 잃은 지 50일 됐다는 한 중년 여자는 위미리 바닷가 앞에서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너무나도 사랑했던 어머니를 여읜 지 얼마 안됐다는 한 젊은 처자는 말 없는 자연이 큰 위로가 되었다고 했다. 분당의 한 중년 여성은 모처럼 자연에서 걷는 동안에 그동안의 삶이 얼마나 피폐하고 허

 

망한 것인지를 때닫고, 서울로 올라가자마자 남편을 설득해서 집을 내놓고 한 달만에 경기도로 옮겨 앉았단다.

  이 길을 걸어본 이들은 한결같이 약속이나 한 듯 내게 말한다. 행복하다고, 정말이지 행복하다고. 돌이켜보면 그 산티아고 길에서 영국 여자를 만난 건 내겐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이었다. 한순간의 만남이 내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놓았기에. 그르고 숱한 올레꾼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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