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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 한 학기의 감각.

2020.06.27 02:27

신선한새 조회 수:285

 "백일의 기적? 시간이 그런 식으로 분절될 리가. 그건 그냥 희망고문이라고 본다."


  달력상 날짜로는 봄이었지만, 날은 쌀쌀하고 외기가 닿으면 오른다리 측면이 저미듯 아파서 극세사 담요를 다리에 두르고 열선을 최대로 올린 조수석에 앉아서 내뱉은 말입니다.  그 무렵엔 약간 하루하루 넘기는 것이 너무나 절박해서 달력에 날짜를 네임펜으로 굵게 쓰는 걸로 하루를 마감하곤 했었죠. 백일이란 언젠간 오겠지만 오지 않을 것 같은 상상 속의 동물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백일이 훌쩍 지나가고, 한약과 침의 도움으로 몸도 어느 정도 추스러지고, 여전히 뇌 기능이 다 회복되진 않은 것 같지만 그래도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있게 되자 삼칠일이나 백일 같은, 이것이 한달도 아니고, 석달과  넉달 사이에 걸쳐진 애매한 어떤 시간을 왜 분절의 단위로 삼았을까라는 질문을 곱씹다가 오호~ 하며 나름의 답을 써 봅니다.


 백일이란 얼마 정도의 시간이지? 생각하다보니 한 학기 정도더라구요. 대학에 입학하고서 한 학기는 출산 후 백일과 비슷하게 삶을 뒤흔드는 경험이었는데요. 입학 후 2주나 출산 후 2주는 정신 없이 쏟아지는 축하와 새로운 행동양식을 듣다가 지나가는 것이고 그 이후,


 삼칠일은 변화의 인지, 백일은 변화의 체화! 

 

 삼칠일, 이제 몸은 대충 바뀐 형편을 받아들여 볼까 하고 있고 마음은 왜 몸이 못 따라오나 화가 버럭나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학교에서 한자로 가득한 전공 책은 슬슬 진도에 탄력이 붙어, 볼 양은 많아지는데 까막눈에 가까운 본인의 상태가 짜증스러워서, 혹은 머릿 속으로 그렸던 학부 생활과는 다른 현실에 혼란스럽고 화가 났었는데 비슷하게도 출산 후 삼칠일 무렵엔 최대 과업이던 모유 수유가 맘대로 안되서 그러했었지요. 낳고 사흘이면 젖이 돈다는데 이건 왜 콸콸 잘 나와주질 않는 것인가? 한약의 도움으로 이제 좀 생산이 되나 싶지만 양을 늘리려면 최대한 자주 물리고 유축도 해야한다 하는데 애는 귀찮아 하고...... 하루 종일 여기 매달려서 뭘 하는건가 하는 회의감과 피로감.  한 페이지에 한자 사전을 열번은 동원 해야 하는 것과 비슷하게 이 아이가 왜 이럴까를 찾아 내기 위해 정신 없이 이것저것을 떠올리고 끼워 맞추어 나가는 고달픈 시간.  이게 제대로 되고 있긴 한건가? 퇴원하던 날 나이 지긋한 간호사 쌤이 "육아는 자신감이예요! 힘내요!"라고 했지만 아는게 없는데 도대체 무슨 근거로 자신감이 나오나....


 그 후 백일 전까지는 아기가 내는 퀴즈는 어제는 이것이 맞았는데 오늘은 그것이 아닌 상황. 모유수유의 현장도 뻑하면 유선이 뭉치고, 유관이 막히는 등등의 고난의 연속. 하드웨어는 좋다고 했는데 이게 대체 뭔가,  모유 수유 역시 특별한 사람만이 가능한 것이 아닌가를 고뇌할 때, 수유센터에서 "가슴에는 진짜 100일의 기적이 있는 것 같아요. 맨날 유선염 때문에 일주일이 멀다하고 오던 엄마가 97일차에도 유선염으로 열이 40도로 올라서 '제겐 백일의 기적 따윈 없나봐요'했었는데 그 이후에 문제가 싹 사라져서 단유할 때 다시 만났어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수준으로 넘겨 듣고 말았는데 아하!


백일을 넘기자 몸이 드디어 변화된 상황을 수용하고 기능하기 시작하더라고요. 어떻게 어떻게 험난하게 한학기를 보내다가 기말 고사 볼 때쯤 되면 대강 짐작으로 때려 맞춰도 한자를 읽을 수 있게 되어 전공 서적을 읽으면서 아! 드디어 까막눈은 벗어났구만! 라고 생각되던 그 상황과 같은 조각처럼 느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여전히 오답으로 좌충우돌하고 몸은 피곤하고 환경적으로는 엔트로피가 높지만 그래도 일정 수준이상의 통제는 가능한 상황.  


  이 고단한 매일매일이 모여서 이루어진 대충 통제 가능한 상황을 두고 기적! 이라고 표현했던 것이로군 싶습니다.


  꽤나 두툼해진 제 차트에 적힌 수많은 처방과 다 모으면 차 한대 정도는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를 양의 침 덕택으로 열 두 학기를 무사히 넘긴 것 처럼 만만치 않을 것 같은 육아의 시간도 역시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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