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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직도 '광고'로 보이냐? (강위 강추^^)

2008.12.04 12:19

약초궁주 조회 수:1690 추천:220

onlineif.com에 연재하는

<강위의 지글지글>

 

 

내가 아직도 ‘광고’로 보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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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을 즐겨 보지 않지만 어쩌다 시청을 하게 되면 당혹스러울 때가 많다. 쏟아지는 광고들, 신선하다고 보기에는 난해한, 도무지 무슨 광고인지 알 수 없는 광고들이 적지 않다.

 

때는 세기말, 1999년 전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던 CF가 있었으니 SK 텔레콤 TTL. 외계인마냥 눈이 큰 소녀가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스무살, TTL”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그 후속편은 역시나 그 소녀가 토마토를 마구 던지고 터트린다. 아직도 그 장면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그 광고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후 광고는 급속도로 변해 갔다. 고무장갑을 팔기 위해 입으로 물어뜯고, 양쪽에서 잡아당겨도 끄떡없다는 내구성 과시용 광고를 탈피, 선남선녀풍의 남녀가 등장해 무조건 달리다 끝나는 식의 광고들이 다수 등장했고, 소비자들은 상품 파악은 힘들지만 강렬한 느낌이나 신선한 아이디어, 꽂히는 광고 문구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당연히 모든 시도가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광고로서는 최대 굴욕, 공들여 광고를 만들었고 소비자들은 그것에 강한 자극을 받지만, 정작 무엇을 광고한 것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 역시 뒤에 언급할 CF를 보고 딴지를 걸어 보려고 작정했지만 이내 수렁에 빠졌다. 무엇을 광고한 것인지, 어떤 검색어로 검색을 해야 하는지 막막했던 것이다. 주변에 수소문 해 봐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광고를 설명하면 “본 적 있다”는 반응이었지만 그게 무슨 광고인지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언니나 멘토 같은 상사는 왜 안 보여주나

 

“똑 사세요, 똑이오”, “아름다운 밤이에요” 등의 문구로 인지도를 높인 배우 장미희는 최근 종영된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에서 고상하다 못해 치를 떨게 하는 사모님 연기를 체화된 경지로 선보인 바 있다. 이 이미지를 백분 활용한 광고가 ‘LG 텔레콤 3G 서비스 OZ’다(이것이 LG 텔레콤 광고인지는 검색 과정 중 알아냈다).

 

이 CF는 (주)오주상사 영업2팀의 직장생활 단면을 시리즈 형태로 엮어낸다. 영업2팀 구성원은 카리스마 팀장, 간지 차장, 촐랑 과장, 애교 대리, 그리고 얼짱 사원이다. 총 다섯 명의 구성원 중 여남 비율은 1 대 4, 장미희 팀장만이 여성이다. 구성원들의 캐릭터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볼 수 있는 캐릭터들을 다분히 작위적으로 배치한 것으로, 여성이 팀장이라는 설정은 일면 전위적으로 보일 수 있으니 속사정은 그렇지 않다.

 

직장 상사를 그려내는 방식은 흔히 두 가지다. 하나는 지극히 엄격하고 잘나기까지 해서 부하직원들을 기죽이는 재수 없는 상사, 다른 하나는 잘난 것도 없이 지지리 궁상이면서 시키는 일만 많아서 짜증나는 상사. 오주상사의 장 팀장은 어디에 속하는가? 그는 계약 성사를 위해 팀원을 버리는 냉철함이 있지만 대리운전을 하는 팀원에게 온정(?)을 베푸는 자애로운 성품도 지녔다. 이것만 볼 때는 전자에 속하는 듯하지만, 영어 회의에서 ‘피니쉬’ 한 마디를 던지고, 옥외광고(2, 4호선 사당역 환승 통로 전면 배치)에서는 자신의 미모에 빠져 허우적대는 맹한 모습을 연출한다.

 

이런 장 팀장의 모습에 사람들은 이중적 매력을 느낄지 모르겠지만, 보고 있는 나는 경악할 따름이다. 40대 초·중반의 여자 상사가 실제 저런 모습이라면? 직업세계의 전장에서 팀장의 자리를 거머쥘 만큼 실력을 갖춘 상사를 보면, 그 사람의 인격과는 별개로 그 일단 가슴이 벅차오른다. 아무리 아니라도 해도 여남 차별이 횡횡한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생존했느냐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모 기업체에 근무하고 있는 한 친구는 친구들이 모인 술자리에서, 씹어도 씹어도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 질긴 오징어를 씹어대듯 억울함을 토로했다. 팀에 자기와 띠동갑인 여자 상사가 있는데 일은 지지리도 못하면서 친구가 처리한 일을 자기의 성과로 가로채는 기술이 ‘퍽치기’ 뺨치며, 더 높은 직급의 남자 상사에게 콧소리 섞인 애교를 떠는 모습에 혈압이 올라 하루에 수십 번이나 하느님, 부처님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 친구의 마지막 한 마디는 이랬다. “그 따위로 일하면서 내 월급의 서너 배를 받는다는 게 참 씁쓸하다.”

 

몇십 분에 걸쳐 진행된 성토를 들으면서 나는 돈도 돈이지만 존경할 수 없는 저질 상사를 둔 친구에 대한 애처로움에 콧날이 시큰해져 말없이 빈잔을 채우고 건배를 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직장생활의 애환을 함께 고민해 줄 ‘언니’, 본보기가 되어주는 ‘멘토’는 보이지 않고 ‘저렇게는 되지 말아야지’ 다짐하게 만드는 환경에서 어떻게 아름드리나무가 자랄 수 있겠냔 말이다.

 

 

‘게이 남자친구’는 왜 완벽해야 돼?

 

SK텔레콤 ‘그녀들의 T타임’ 요금제 광고를 보고 광고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나는 네이버와 구글에 수많은 검색어를 쳐야 했다. 여자들의 수다가 길어지는 이유를 밝혀내기 위해 설정한 상황은 이런 것이다. “괜찮다 싶으면 여자 친구가 있고, 완벽하다 싶으면 남자친구가 있다.”

 

열 받고 속상한 마음을 수다로 푸는 것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 동의한다. 수다가 정신건강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핵심은 피한 채 겉도는 얘기들을 늘어놓으며 부어라 마셔라 술값만 축내는 모임들에 속내를 홀랑 까발리는 수다 한마당은 얼마나 건강한가.

 

하지만 모든 수다가 건강한 것은 아니다. 어떤 수다는 불량식품처럼 입에는 달지만 몸을 축내기도 하고, 나는 쇳덩어리를 뱉어내 홀가분하지만 상대방의 가슴에 쇳덩어리를 옮겨 심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실컷 떠들었는데 개운한 맛이 없고 오히려 허탈하기만 하다면, 수다를 통해 A지점에서 B지점으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A지점에서 공회전만 했기 때문이겠다. 해봤자 쓸모없는 짓에 열량을 낭비하면 괜히 배만 더 고파진다는 말이다.

 

이 광고도 비슷한 맥락이다. 딱 봐서 괜찮은 남자에게 애인이 있다는 것이 전화통을 붙들고 하소연할 일인가? 연예인이나 그에 뺨치는 외모를 가진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은 동물적 본능이다. 아름답고 훌륭한 것을 대하고 느끼는 호감을 어떻게 막겠는가. 하지만 내가 호감을 느끼는 모든 대상과 연애를 할 것도 아니며, 그럴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구태여 공회전으로 체력, 전기력, 경제력을 허비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문제가 이것만이었다면 나 역시 공회전을 하듯 입 아프게 떠들어댈 필요도 없었다. 이 광고가 내 심기를 건드린 이유는, 광고가 이분법적이고 유치한 이데올로기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 국내에 외국 드라마 열풍이 몰아치면서 자연스레 ‘퀴어 문화’가 영입되기 시작했다. 남자와 여자의 단조로운 결합이 아니라 남자끼리, 여자끼리, 남자와 여자 모두를 애인으로 삼는 다양하고 아름다운 문화가 서서히 전파된 점은 다분히 긍정적이다. 하지만 일반 대중들에게 ‘그들’은 너무 멀리 있다. ‘그들’은 수려하고 재능있고 세련되고 재치있다. ‘우리’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다. 그들을 보면서 ‘나도 이성애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있어. 저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공감해’라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고양시키지만, 바닥에서 1센티미터도 뜨지 못하면서 공중부양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마냥 우스운 일이다.

 

가령 내가 영화 <영화는 영화다>를 보고 간지가 줄줄 흘러내리는 소지섭에게 반했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소지섭이 나의 이상형이거나, 내가 소지섭과 연애할 의사 혹은 연애할 가능성은 거의 제로다. 마찬가지로 미디어에 비쳐진 퀴어들의 모습에 열광한다고 해서 퀴어 문화를 수용하거나 체화했다고는 보기 힘들다. 오죽하면 “나도 게이 남자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말에 많은 여성들이 촉촉한 눈망울로 고개를 끄덕이겠는가. 그런 눈망울을 볼 때마다 “세상의 모든 게이들이 니들 입맛에 맞는 줄 아니?”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깔딱거림을 느낀다.

 

퀴어들이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민한 것은 일정부분 사실이다. 그것은 고착화, 권력화된 이성애자들의 세계에서 서로를 알아볼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퀴어들이 수려한 용모를 가졌거나, 문화·예술계에 종사하거나,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갖췄거나, 문화적 감수성이 풍부하고 타인을 잘 배려하는 것은 아니다. 이성애자들의 세계도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들이 실제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극소수에 불과할 뿐 일상에 발 디딘 많은 이들은 제각각 생겨먹은 대로 산다. 그렇다면 퀴어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성적 취향이나 성정체성이 다르다는 차이가 있을 뿐, 나머지 부분은 모두 이 글을 읽는 당신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러니 ‘완벽한 남자’에게만 ‘남자친구’가 있다는 식의 유아기적 발상은 분노보다는 실소를 자아내게 만든다. 이 어줍잖은 광고를 보고 나도 게이 남자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꿈을 가지는 여성분들이 있다면, 당신은 이미 게이 ‘친구’가 있을지 모른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예민한 촉수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보지 못할 뿐, 착한 사람 눈에만 보인다는 큰바위얼굴처럼, 얼굴이 크고 여드름투성이에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복장을 한 친구가 당신이 원하던 게이 남자 ‘친구’일 수도 있단 말이다.

 

예민하게, 더 예민하게

 

2000년대 초반, 연예인들의 본격 짝짓기 프로그램이 성행하기 시작할 무렵 나는 지금은 굉장한 파급력을 가진 인터넷 언론에 ‘짝짓기에 대한 불편함’을 토로한 적이 있다. 그 기사에는 다양한 악플이 주렁주렁 달렸는데 그중 수 년이 지난 후에도 잊혀지지 않는 게 있다. “보면서 웃고 떠들라고 만든 프로그램에 뭐 그리 예민하게 구냐. 그럴 거면 안 보면 되지 않느냐. 나는 재밌기만 하더라. 그거 보는 낙으로 산다.” 아주 평범한 지적이었는데 누군가 내 코를 빨래집게로 꽂은 후 힘껏 잡아당긴 것처럼 온 몸이 짜릿하게 화끈거렸다. 뭔가 침범해서는 안될 그들만의 영역에 들어가 설레발 친 것 같은 느낌. 이후 짝짓기 프로그램은  전국유랑형, 본격맞선형 등으로 진화했지만 그에 대해 촉수를 세우지 않게 된 배경에는 내 코를 제대로 잡아당긴 그분의 역할이 컸다.

 

하지만 내가 분기탱천한 이유는 딴 데 있었다. 프로그램이야 골라서 본다고 쳐도 광고는 다르지 않은가. 30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빠르게 치고 빠지는데, 그 파급력은 엄청나다. 위에 언급한 광고들을 보고 신선하다, 재밌다 등등의 의견을 늘어놓는 걸 지켜볼 수가 없다. 최근 광고뿐 아니라 자기계발서 분야에서도 ‘스토리텔링’ 기법이 각광을 받고 있다. 딱딱한 지침이 아닌, 정형화되고 도식화된 인물의 삶을 이야기 풀어내듯이 술술술 적어놓았기에 술술술 잘도 읽힌다. 그리고 딱 그 정도의 시야와 가치관을 가지게 된다.

 

Easy come, easy go. 쉽게 오면 쉽게 나간다. 꼭꼭 씹어 먹는 밥이 온몸에 고르게 퍼지고, 자박자박 걷는 길 위에서 만물이 내게로 스며든다. 미디어를 수용하면서 입을 헤벌리고 숨을 쉬듯 쉽게 받아들이면 몸속에 먼지만 쌓일 뿐 하등 얻어지는 게 없다. “나는 그렇게라도 스트레스를 풀어야겠소, 당신이 뭔 상관이오, 나는 즐겁기만 한데!”라고 말한다면 나는 여전히 코끝을 매만지며 머쓱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겠다.

 

그러나 한마디만 하자면, 제발 ‘예민함’을 좀 가져라. 내 입으로 들어가는 게 똥인지 된장인지, 국산인지 미국산인지는 가리면서 왜 정신적 양식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지 안타깝기 이를 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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