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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그건 너무 쉬운데?

2009.02.27 13:14

강위 조회 수:1667 추천:230

너, 나 좋아하지?

 

 

우리 사귀자 대학교 1학년, 휴가 나온 ‘군바리’ 선배들은 상대를 가리지 않고 편지를 구걸(?)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편지쓰기를 좋아하고, 공수표 날리는 것을 싫어하며, 사람에 대한 애정이 큰 나는 일면식뿐인 선배들에게 종종 편지를 보내곤 했다. 대부분은 당황과 감사 정도로 반응했지만, 몇 몇은 나를 황당함을 넘어선 분노의 경지로 몰아갔다.

 

 

휴가 나온 군바리 모 씨. 그는 취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다가 밖으로 불러낸다. 혀가 살짝 꼬이는 그는 영양가 없는 몇 마디를 던지면서 게슴츠레한 눈빛을 흘려댄다. 다 알지 않느냐는 눈빛인데 난 정말 모르겠다. 다음 순간 그는 ‘제법인데?’ 하는 표정으로 내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린다. 난 그의 손을 쳐낸다. 지금, 뭐하자는, 거지?

 

“너 말이야, 나 좋아하지?”

“네?”

“편지 말이야. 그거 나랑 사귀자는 거 아냐? 좋아, 사귀자.”

 

스무 살, 나이가 한참 많은 선배의 뺨을 때린 후 나는 한동안 되먹지 못한 애라는 구설수에 시달려야 했다. 무엇이 나를 그토록 화나게 만들었을까? 나는 그를 ‘사람’으로 대했지만 그는 나를 ‘여자’로 대한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억울함을 잘 참지 못하고, 감정 표현이 지나치다.

 

 

 

연애 몇 번이나 해봤어?

 

 

상대방에 대한 사적 정보를 캐는 것에 익숙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이, 가족관계, 심지어는 키나 몸무게를 물어대는 데 거침이 없다. 질문 중 빠지지 않는 것이 연애 경력과 연애 기간. 나 또한 ‘연애 몇 번 해봤어?’ 라거나 ‘마지막 연애가 언제였어?’라는 질문을 할 때가 있는데, 그 때마다 혀끝을 깨문다. 무례한 질문이기도 하고, 바보 같은 질문이기도 하니까. 내 경우에는 상황과 상대에 따라 대답이 달라진다. 이것은 내 자신을 위한 거짓말이라기보다 상대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 싶다.(엄마에게 ‘모르는 게 속 편할 얘기’를 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상대가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한 이야기는 말하지 않는 것이 관계유지에 도움이 되더라)

 

연애를 몇 번 해봤느냐. 이것은 무모하고 무례하며, 모호한 질문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연애라고 ‘꼽아야’ 할까? 섹스한 사람이 몇 명이었냐는 질문이 비교적 명확한데 반해 연애는, 참 어렵다. 호감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한 사람이 먼저 ‘사귀자’고 제안하고 다른 이가 그것을 수락한 경우, 공식석상에 당연히 동반하고 친구들로부터 ‘연인’ 소리를 듣는 경우 등을 일반적으로 연애라 칭하는 듯하다. 하지만 어떤 연애는 모든 절차가 생략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완벽한 비공개 버전으로 진행된다. 시작과 끝이 모호한 경우도 많으며, 완전히 끝났다가 다시 이어지기도 한다.(이 경우는 한 번일까? 두 번일까?)

 

연애를 할 때마다 ‘이것이 첫 연애’라고 말하는 사람을 보았다. 나도 그런가? 나의 첫 연애는 언제였을까?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나의 첫 섹스 상대와 첫사랑은 다른 사람이다. 첫사랑과는 연애만 하지 않았다. 소위 ‘사고’라고 칭해지거나, ‘애매하다’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연애 경력에 넣어야할까, 말아야 할까? 도대체 나는 연애를 몇 번이나 한 걸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연애라 불러야할지 당체 모르겠다. ‘연애 몇 번?’ 과 같은 질문은 주고받지 않는 게 상책이겠다. 모든 남자에게 ‘여자친구 있어?’ 라고 묻고 모든 여자에게 ‘남자친구 있어?’ 라고 묻는 것이 무식이자 폭력일 수 있는 것처럼.

 

 

 

지뢰를 찾아가는 순간이 좋아

 

 

고스톱도 못 칠 정도로 잡기에 능하지 못한 나는 고난위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컴퓨터 게임을 즐기지 못한다. ‘슈퍼마리오’에서는 앞으로 가면서 점프하기를 익히지 못해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고, ‘스타크래프트’는 종족 증식에 열중하지만 만들기 무섭게 다 파괴된다. 포켓볼을 치면 공이 옆 테이블로 날아가고, 볼링공은 어김없이 도랑으로 빠진다. 이런 내가 즐기는 건은 고작해야 ‘지뢰 찾기’다. 접근성이 용이하고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는 이 게임을 나는 벽지를 뜯어내고 싶을 만큼 무료하거나, 한글 새 문서와의 눈싸움에 지치면 가끔 찾곤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지뢰 찾기’는 일면 내가 인간관계를 맺는 방식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게임 시작과 동시에 나는 몇 개의 블록을 무차별적으로 클릭한다. 어떨 때는 클릭 두어 번 만에 지뢰가 터지는데 크게 애석한 마음은 없다. 딱히 지뢰를 찾을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니니까. 그런데 서너 번의 클릭으로 열댓 개의 블록이 열리면, 마음이 좀 달라진다. 몇 마디 나누지 않았는데 제법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처럼 의자를 바투 당기고 집중하기 시작한다. 열려진 블록에 쓰인 1, 2, 3이란 숫자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고 제법 머리를 굴린다. 그러다 지뢰가 터지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지뢰를 찾으면? 그때부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모든 연애는 유치하다는데

 

 

가끔 너무 쉽게 지뢰가 찾아져 허망하고, 엄청나게 공들였는데 지뢰가 터져버려 속상하다. 관계에서도 그렇다. 폭죽인 줄 알았던 관계가 사실은 지뢰여서, 서로에게 상처와 아쉬움을 남기기도 하고 아무리 애절하게 공을 들여도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연인’으로 묶일 수 없는 관계도 있다. 헌데 요즘 나는 정작 지뢰를 찾아내 ‘찜!’하는 순간보다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에 매혹되어 있다. 몇 번의 접촉으로 수십 개의 블록이 열리고, 그 블록에 적혀진 문자를 해석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클릭을 망설이는 순간이 좋다. 나에게 연애는 심심풀이 오징어땅콩이나 지뢰 찾기처럼 가벼운 문제가 아니지만, 일어날 듯 일어나지 않는 미묘함의 미학은 언제나 사람을 설레게 한다.

 

수년 째 호기심과 설렘을 간직한 채 일 년에 두서너 번 만나는 친구에게 내가 말했다.

 

“우린 절대 연애 같은 거 하지 말자. 사실 난 연애할 때 굉장히 유치하거든.”

 

그 친구가 답했다.

 

“나이가 어리든 많든, 모든 연애는 유치한 법이야.”

 

연애는 유치함을 담보로 하기 때문에 그만큼 생기 있고 끈끈한 건지도 모르겠다. 대다수에게는 ‘비공개’ 설정 영역을 ‘공개’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당혹과 실망을 감수하면서 빈곳을 채워주고, 아껴주고, 핥아주는 관계. 살과 살을 맞대는 동시에 가장 내밀한 부분까지 맞닿는 사이. 그래서 연애는 유치하고 그 때문에 치명적인 것일까.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 연애는 너무 쉽다. 이전의 방식대로 하는 연애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제는 지뢰를 밟는 것처럼 짜릿하고 아픈 연애보다는 서로를 살리는 건강하고 뭉근한 연애를 하고 싶다. 이런 연애를 즐기기 위해서는 미묘함을 즐길 줄 아는 근력과 내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한편 하나의 대상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붓는 것만이 연애는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지금의 나를 둘러싸고 있는 관계들 - 상대에 대한 예민한 촉수와 살뜰한 관심, 잘 되기를 빌어주는 진심어린 마음과 실질적 액션이 존재하는 관계들 또한 연애의 자장에 속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는 지금 이 순간 ‘연애’ 중인지도 모르겠다. 허리 아래가 사라질 때까지 걷고 싶은 봄밤이면 미풍에 실려 스며드는 얼굴들이 몇 몇 있으니 말이다.

 

 

* <문화미래 이프>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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